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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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가 ‘좋은’ 자유일까. 이글턴은 “절대 자유를 구속하려는 것은 바람을 동아줄로 묶어두려는 시도와 같아서 만약 묶인다면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139)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헤겔과 함께 이글턴은 절대 자유는 ‘나쁜 자유’라고 구속한다.
헤겔은 “절대자유라는 파괴적 자유에 상응하는 것은 일종의 공허와 무, 한계를 가진 모든 실정적 존재들의 잠재적 욕망 내지 환상”(127)이라서 “자신의 세계를 폐허로 만드는 이런 종류의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 역시 파괴하고 말 것”이고 그래서 절대 자유는 나쁘다고 본다.
이글턴은 “타자가 존재하는 한 잠재적인 위협은 언제나 존재하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면 완벽한 자유는 불가능하다”(127)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모든 종류의 경계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자유는,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는 경계 안에도 머물 수 없으며 결국 부정성의 블랙홀 안으로 사라지고 말 것”(128)이라고 ‘나쁜 자유’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또한, 절대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 무(無)로 전복되는데, 특정한 무엇도 되지 않음으로써 잠재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선은 긍정적 부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순수하고도 맹목적인 부정 상태로 귀결된다”(129)는 견해도 표명하면서 절대 자유는 ‘나쁜’ 자유라고 구분 짓는다. 누구나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구속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구속하려는 시도를 할 자유는 있는 것이다.
2
이글턴은 어떠한 경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파괴를 통해 “공허와 무”, “순수하고 맹목적인 부정 상태”에 이르게 되는 ‘나쁜’ 자유인 절대 자유주의자의 예로 근본주의자, 허무주의자를 언급한다.
이글턴이 탈레반 출신이든 텍사스 출신이든 근본주의자와 허무주의자를 나쁜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제1원칙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을 거부하고 배제한다.”(53)는 것이다. 즉,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53)때문에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질서와 절대 진리 양자만이 존재한다”(53)는 것이다. 그들에게 질서가 아닌 것은 무질서일 뿐이며,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글턴이 보기에 이들의 문제점은 “자신들 기준에 부족한 것은 무엇이든 무질서로 명명하는 자기만족적 명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54)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만족적”이 아니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누구나 자신의 논리가 옳고 완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틀릴 수도 있다는 반성적 인식이 없다면 절대주의적인 파괴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글턴은 “무정부 상태와 절대주의는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하다”(54)고 본다. “그들 모두는 암묵적으로 무질서를 본질적 조건으로 간주하는데, 단지 절대주의가 무질서를 두려워한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은 그 상태를 향유할 뿐”(54)이며,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세계가 결국 강력한 통치체제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는 다시 또 절대주의로 이어진다.”(54)는 것이다.
결국 이글턴이 보기에 문제는 “거룩한 무질서의 찬양자들은 본질적으로 모종의 질서를 수용할 수 있는 세계만이 무작위 한 폭력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54)이다.
그 “모종의 질서”가 수용할만한 것인지 아닌지 따져 물을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 질서의 내용이 수용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질서의 내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지 “질서 자체”를 거부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질서가 아니면 무질서라고 규정해 버린다면 독단적인 파괴범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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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이 절대 구속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나쁜’ 자유라고 구속하려는 이유는 절대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자유에 대한, ‘좋고 나쁨’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야 자유이겠지만 그 추구 행위에 대해서는 논의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만이 절대적인 것이라며 그에 대해 어떠한 논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타인과 자신, 모두의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파괴적이지 않은 창조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좋은’ 자유를 위해 파괴적인 절대 자유를 제어할 장치로서 상호 양보와 타협이라는 관용의 태도, 그러한 태도를 통해 이끌어 낸 ‘모종의 질서’는 필요한 것이다.
*“ ”인용은 T.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역, 생각의 나무 2007. ( ) 안은 이 책의 쪽수.
2014.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