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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an 06. 2024

책속에서_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

이 책은 ‘글쓰기 이론'의 맥락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이다.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서가를 기웃거리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knowledge)의 목표와 방법은 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플라톤과 주디스 버틀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을 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행위는 곧 행위자라는 뜻이다. 

행위자(나)를 알려면 자기 행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3~14쪽)      


    

2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4쪽)          



3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4쪽)          



4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 언제나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윤리와 언어 뿐. (낯선 시선 중에서)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7쪽)          



5

서구 철학 전통에서 거울은 자기 인식의 단계이자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한 인식은 착각에 불과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같다면 자기복제가 아닌가. 

결국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 보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관계성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부분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23쪽)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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