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슷한 경험을 말하지만 역자는 동의할까. 역자와 나의 경험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을까.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차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차별일 것이다. 내가 느끼는 차별의 근거는 ‘살벌한 생존 경쟁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묻지 마 폭력이나 살인을 그런 구조로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고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니 각박해지고 차별이나 불평등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 구조에 대한 생각과 감각도 성별이나 연령과 거주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경험하는 것 또한 성별, 연령, 거주지 등이 다르기에 같을 수 없다면 다른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를 다르게 경험한다면, 다른 경험 그 자체가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면, 자본주의를,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치와 평등’, ‘사랑과 우정’에 기반한다는 미완의 공동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때 강철과 같이 단련되었다던 ‘혁명 정당’이 있었다. 자치와 평등,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강철 같은 혁명 정당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까. 경험과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하영진, ‘경험과 차이’, <보라의 시간> 230-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