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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변하지 않으려면

by 영진

기회주의? 민중 선동책? 인내심? 실용적 지능? 어느 것으로 규정짓든 간에 원전 중단에서부터 난민 수용을 거쳐 최근 보여준 유럽에 대한 철학의 변화까지 메르켈의 몇 가지 혁명을 이끈 바탕에는 독일 국민들에 대한 깊고 탁월한 이해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메르켈은 여성과 난민 문제에서 거대 정당 기독교민주연합(CDU)을 약간 왼쪽으로 당겨 보수주의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당을 변화시켰다.

냉전 종식 후 탄생한 복잡한 세계, 그가 태어난 세계, 신흥 강대국들이 옛 미국-소련 간 대립을 대체한 세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가 전통적 정치와 통치 방식을 말 그대로 부숴버린 세계에 맞서 메르켈은 람페두사(Lampedusa)의 소설 <치타>에 나오는 철학을 적용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메르켈은 사라진 행성에서 불쑥 나타난 지도자다. 기존 질서의 밖에서 온 이방인이다. 공산주의 정권의 평등주의 선전 교육을 받았고, 사치와 물질적 이익에 무관심하며, 공식 의례와 사교 행사와 제도적 대표성을 싫어하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정치를 선호하며, 문제에 실제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2020년 3월과 4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초기에 엘리자베스 2세와 메르켈이 했던 각자의 연설에서 둘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 대한 공감을 보이고, 위기 회복력에 호소하는 것, 문제를 과장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 것.


--마리옹 반 렌테르겜 지음, 김지현 옮김, <메르켈> 333-334쪽.



2025, 7. 4.



과테말라, 플로레스, 잇차 호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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