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3

by 영진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는 무장봉기에서 촉발되었다. 그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식 때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3월 10일 경찰 발포에 항의한 총파업이 있었다. 제주도 직장의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이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청 하지(J.R. Hodge) 중장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여 3·10 총파업은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 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었고, 남로당원 색출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청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인들로 교체됐고,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 검거 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도 잇따랐다. 제주도민들의 육지인에 대한 반감은 이때부터 심해졌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제주도 양민학살에 동원될 수 없다며 출동을 거부하는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하에서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안마을로 피해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심지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되면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이 자행됐다.




4·3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약 2만 내지 3만 명,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었다. 그러나 4·3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적인 사태를 일으켰다.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사계리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도 이때 학살된 것이었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 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이때 3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제주 4·3사건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남로당 신진세력의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창비 2021, 64-68쪽.



2025. 7. 3.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낱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