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븐숭이는 널찍한 돌밭이라는 뜻이다.
너븐숭이에서 진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추모의 염을 일으키는 것은 길가에 있는 애기 무덤들이다. 관도 쓰지 않은 무덤인지라 대야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현무암을 둘러놓은 것이 전부인 애기무덤 여남은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애처롭고 슬픈 풍경을 나는 다 표현하지 못한다.
무덤가에는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세운 작은 까만 대리석 비석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와 상생(相生)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남겨진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형제적 연대감과 평화를 기원하나이다.˝
조촐할지언정 위로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진실되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누가 이 애기무덤과 비석을 보면서 4·3을 불온분자의 폭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적지의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도 더러는 애기무덤을 보면서 ˝아이들까지도 죽였단 말인가?˝라고 적이 놀라고 의심이 가는 분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말 당시는 그랬고, 그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사실도 있다. 제주의 화가 강요배가 4·3사건을 주제로 한 「동백꽃지다」 연작을 전시할 때 얘기다. 요배 그림을 좋아한 그의 팬 한 분은 그의 이름까지 멋있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은 이름도 예술적이에요. 아버님이 멋있는 분이었나 봐요˝라고 친근하게 말하자 요배는 멋쩍은 듯 아무 말 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때 요배는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에는 4·3사건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 있다. 4·3사건의 양민학살 당시 지금 제주공항인 정뜨르에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호명할 때 ˝김철수˝라고 불러 동명을 가진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때 요배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은 절대로 동명이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어 요배의 형은 강거배, 요배는 강요배가 된 것이다.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그렇게 깊고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곁으로 큰길 안쪽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순이삼촌‘이라고 새긴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진 수십 개의 장대석이 널부러져 있다. 마치 북촌리 학살 때 시신들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비석을 향해가는 동안 소설의 구절들을 스치듯 읽게 되니 자연히 고개가 땅을 향하여 추모하는 자세가 된다. 제주도에서 본 가장 진정성이 살아 있는 기념설치물이었다.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순이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여 무슨 오해라도 살까 봐 4·3을 쉬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3사건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창비 2021, 72-74쪽.
2025.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