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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 걸음

물질대사로서의 노동

by 영진

맑스는 인간의 ‘노동’을 ‘물질대사’라는 말로 대신한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 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칼 맑스, 237)


맑스는 자연과의 물질대사는 인간의 생활에서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라고 말한다(칼 맑스, 246). 즉,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우리는 결코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그러한 한 에서 노동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이토 고헤이, 22)


‘물질대사’로서의 인간의 ‘노동’이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라는 칼 맑스의 말에서, ‘물질대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자연도, 인간도, 물질대사 도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이면서 전체’인 ‘관계’로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또한, 인간의 목적 의식적 행위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달과 ‘물 질대사’의 과정에서 자연 및 인간의 파괴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 지는 않는다고 이해한다. 그러니까, 거미도 인간도 그들의 자체 보 존 혹은 그 이상의 진보를 위한 노동이 파괴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이해한다.


한편으로, [식물의 사유]의 저자들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자연의 ‘발전’이나 ‘진보’의 의미를 묻게 된다.


나는 혼자서 다른 생명 존재들을 존중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진 정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질 서에 조정 당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회 안에서 공존에 필수적인 규칙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나 자신의 주체성을 억누르지 않 는 구조로서 그 규칙들을 존중하였습니다. 나의 욕망은 살고 생명 의 문화를 가꾸는 것이었습니다.(식물의 사유, 73-74)


[식물의 사유]의 저자들이 말하는 “나의 욕망은 살고 생명의 문화를 가꾸는 것”은 칼 맑스가 말하는 ‘물질대사로서의 노동’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의 파괴가 아니라 자연 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목적의식’이 인간의 ‘진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영진, '식물의 목적', <춤추며 한 걸음> 77-79쪽.





춤추며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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