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로 변하는 조건

by 영진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가 일정하게 기술을 발전시키면 그 기술력들이 어느 단계에 가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안 되는 단계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복제 기술이 그렇다. 지금 USB 하나만 꽂으면 어마어마한 파일이 다 복사가 된다. 근데 원래 만들 때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고 해서 하나에 얼마씩 계산해서 돈 받고 팔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사고 복사해 버린다. 그러면 시장 논리에 안 맞다.


리눅스처럼 그냥 공유하자. 이렇게 돼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시장 원리에 따라서 얼마씩 다 받아야 돼. 그러면 온갖 다른 방식을 통해서, 법률을 통하든지 국가 권력이 개입해서 시장 논리, 자본주의 논리가 아닌 것으로 커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술들은 이미 자본주의를 살살 넘어가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에 가 있는 기술인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을 양적인 변화라고 본다면 어느 단계에 가면 그게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져서 자본주의를 위한 기술들이었는데 이미 자본주의를 위한 기술로 기능을 안 하기 시작한다. 변질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회주의로 가거나 공동체로 가거나 하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변화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날 때 그게 그다음 단계로 일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뭔가 확 변해가지고 그 변하는 단계를 어떻게 설명할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양질 전환’을 문제 삼는 지점이 그런 것이다. 양이 극대화되면 자연스럽게 질적으로 변하냐, 그래야 한다. 양질 전환이라는 것이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게 설명이 안 되면 문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질로 변하는 어떤 조건을 따지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 설명하면서 이렇게 축적이 돼서 이 정도 되는 게 기본이라고 얘기했다. 그건 돼야만 자본으로 변한다. 이런 얘기를 했지만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조건도 있다. 투하되어야 한다는 조건,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조건을 얘기하면서 양질 전환은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부정의 부정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부정도 변증법에서 아주 핵심 법칙인데 앵겔스는 명확하게 얘기한다. 부정의 부정이 아무 때나 된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보리를 땅에 심으면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지만 보리를 빻아 가지고 먹어버리면 양질 전환, 아니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적인 여러 현상들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양질 전환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표현했을 뿐이라고 엥겔스는 얘기한다. 맑스는 자기가 연구해 본 결과 헤겔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봐서 그걸 인정한 것뿐이다. 그런 얘기지 그 법칙에 근거해서 모든 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아니다.



-하영진,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도시의 무지개> , 306-308쪽.





도시의 무지개

매거진의 이전글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