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재수를 결정하던 그날부터 한 박자씩 늦게 흘러갔다.
남들보다 일 년 늦게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목표하던 대학이 아닌지라 마음이 쉬이 잡히지 않았다.
학점을 따지 못 하는 핑계를 대며 전공 외에 다른 것에만 기웃기웃 댔다.
그러던 중 영어공부가 하고 싶어져 영어학원에 다니기 위해 휴학을 했던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친구가 집에 놀러 왔는데 집이 너무 좁아 고양이들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밖으로 나갔다. 어디에서 무얼 하고 놀지 고민하다가 DVD방에 갔다.
여자 둘이서 DVD 방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볼까 고르지 못하고 있으니, 카운터에서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첨밀밀”이라는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본인의 인생영화라며.
이 친구와 중국과 대만 여행을 함께 갔다 왔기 때문에 중화권이 낯설지 않았던 우리는 그분의 추천에 따랐다.
결과적으로는 강산이 변한 지금까지도 누군가 인생영화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망설임 없이 <첨밀밀>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렇게 첨밀밀을 보고 나서 혼자서도 거의 100번은 더 봤을 것이다. 첨밀밀에 푹 빠진 나는 문득 첨밀밀의 여자주인공처럼 맥도날드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면접을 보고 바로 합격하여 금요일부터 일요일 밤 10시부터 다음 날 7시까지 카운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알바를 밤에 하게 된 이유는 낮에는 영어학원에 다녀야 해서도 있지만, 밤에 누가 햄버거를 먹으러 오겠어?라는 얄팍한 생각 때문이는데
밤에 술 취한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다는 말은 차치하겠다.
<첨밀밀>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일을 하게 된 맥도날드에서 그 녀석을 만났다.
그 녀석의 첫인상은 껄렁이고 가벼워 보였다. 비슷한 사람들만 보던 나에게 그 녀석은 날 것 그대로의 수컷 느낌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녀석은 맡은 일에 충실했고, 길어지는 근무시간에 힘든 티나 짜증이 섞인 모습을 보여줄 법한데도 항상 웃으면서 일했다.
멘털이 강한 사람을 동경하던 나는 그 녀석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나에게 가벼운 장난을 걸었고 그런 그 녀석에게 속절없이 설렜다.
그 녀석이 다른 여자들과 장난을 치면 몹시 질투가 나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한 번은 휴무인데도 그 녀석을 보기 위해 굳이 맥도날드 앞에서 기웃거린 적도 있다.
그렇게 혼자 가슴앓이 하게 한 그 녀석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날 같이 퇴사서를 작성했다. 내가 그만두는데 왜 그 녀석도 그만두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맥도날드를 그만두고 나서도 간헐적으로 그 녀석에게 연락이 왔지만 지지부진한 연락에 이대로 흐지부지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하니 친구가 답답하다며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그 녀석에게 카톡을 보냈다.
“보고 싶으면 지금 오든지”
그 카톡 하나로 우리 관계는 급격히 발전하여 그 녀석과 나는 한 쌍의 연인이 되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녀석은 나에게 약간의 관심이 있었을 뿐 나를 좋아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저 멘트에 꽂혔는지 몇 번이고 곱씹었는데 사귄 지 수년이 흐른 후에야 사실 그거 내가 보낸 거 아니라고 고백을 했더랬다.
그 녀석이 실망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첨밀밀>에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은 홍콩행 기차에서 앞뒤로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만남은 맥도날드에서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 녀석과 나도 언젠가 옷깃을 스쳤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생에서였을지도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장소는 틀림없이 맥도날드이다.
<첨밀밀>로 시작되어 맥도날드에서 열매를 맺은 순수하고도 열정적이던 첫사랑은 인생을 적어둔 페이지 곳곳에 지우지 않은 자국처럼 남아있다.
언젠가 그 녀석에게 말한 적이 있다.
아니 에르노처럼 직접 경험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그 말에 그 녀석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주인공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