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도피

2008년 여름방학

by 한신

2008년 여름방학.

이제 막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있었고, 그것이 대학생활의 마지막 방학이라는 사실이 유난히도 무거운 공기처럼 피부에 달라붙었다. 햇살은 이전 여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나의 여름은 명백히 이전과는 다른 색깔이었다. 고요하게 타들어가는 노을처럼, 이 계절이 무언가의 끝이라는 예감이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 여름, 매일 아침 토익학원에 다녔다. 강남 한복판의 덥고 습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사람들의 땀 냄새와 초조한 발걸음 사이를 지나, 9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쳤다. 학원 강의실 안은 어딘가 군대처럼 획일적이었고, 사방을 둘러싼 스피커에서는 ‘이 문제는 매우 자주 출제되는 유형입니다’라는 강사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처음 며칠은 진지하게 노트를 펴고, 듣기 문제에 집중하고, 답안을 적어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앞의 단어들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안다. 그때 이미 마음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는 걸.

토익 점수가 안 나오는 건 단지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영어 점수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릴 수 있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그 말은 나의 안일함이자 변명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정작 그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 ‘언제든지’는 늘 내일이었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하지만 ‘안 되겠다’는 다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무언가를 덮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정이 바로 ‘워킹홀리데이’였다. 한 번쯤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더 본능적이고 절박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더는 이 서울의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와 타인의 시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휴학계를 냈다. 가족에게는 준비된 선택처럼 설명했다. “외국어 능력도 키우고, 삶의 경험도 쌓고 올게요.” 하지만 실은, 취업준비 1년을 벌기 위한 도피였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아직 시간이 필요해.’ 그렇게 혼잣말을 되뇌며, 도망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의미 없는 선택은 두려웠다.


그때 나의 오랜 친구 고다의 소식을 들었다. 대학교를 이미 졸업한 고다는 이미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고, 3개월 후 호주로 넘어가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결정에 작은 확신이 생겼다. 적어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그 작은 위안.


고다가 이미 한국을 떠난 상태라 만나지 못하고 싸이월드에서 쪽지를 주고받으며 막연히 호주 어딘가에서 조우하기로 결정했다. 약속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말이었다. 서로의 계획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고, 미래는 막막했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계획이었고, 모든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두려움은, 정해진 길 위에 선 불안보다 덜 숨 막혔다.

그렇게, 나는 정해진 레일에서 조용히 발을 뺐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선택한 도피가, 결국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도망이 끝나면, 정말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는 건지.



사진: UnsplashMitchell O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