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시작되기 전의 여행
고다와 나는 한국에서 알뜰하게 모은 돈을 종잣돈 삼아 호주에 왔다.
아주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당장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워킹홀리데이의 시작을 ‘노동’이 아닌 ‘자유’로 맞이할 수 있었다는 건 우리에겐 분명 큰 행운이었다.
처음 몇 주는 마치 방학처럼 지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간단히 토스트와 바나나로 아침을 때우고, 열대의 햇살 아래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섰다. 브리즈번의 기차—지하철이라기보다는 지상 열차에 가까운 그것—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처음 보는 풍경은 늘 색이 더 진해 보였고, 바람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혜지를 포함해 같은 쉐어하우스에 머물던 다른 플랫메이트들도 종종 함께했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우린 매일을 소풍 같이 보냈다. 때론 한인마트에 들러 라면과 김치를 사고, 때론 콜스나 울워스에서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과일을 골라보기도 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를 오가는 매일은 그 자체로 여행이었다.
우리 쉐어하우스는 Mount Gravatt의 타운하우스 단지 안에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가 한국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었다. 정돈된 거리와 잔디, 커다란 유칼립투스 나무들 사이로 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단지 한가운데에는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이 있었다.
우린 종종 오후가 되면 수영장으로 내려가 물에 몸을 담갔다. 태닝을 즐기는 외국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주며 말을 섞었다. “Where are you guys from?” 같은 짧은 문장이지만, 그 문장을 던지고, 또 받아주는 일이 그렇게 기뻤다.
내가 가져온 농구공은 종종 고다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 집 뒤편에는 TAFE라고 불리는 기술전문학교 캠퍼스가 있었고, 그곳엔 꽤 넓은 농구장이 있었다. 학교가 끝난 오후 무렵이면 그 농구장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고다와 나는 그들 사이에 슬쩍 껴서 2대2를 뛰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농구는 언제나 언어보다 빠른 교류였다. 땀이 서로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셔츠가 젖을수록 웃음소리도 더 커졌다.
고다와 나는 중학교 시절 농구를 같이 하며 친해진 사이였다. 우리 둘은 그 시절 함께 뛰었던 추억이 있었기에, 패스 하나, 시선 하나에도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었다. 그 코트 위에서만큼은, 고향을 떠나왔다는 외로움도, 언어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정말로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하루의 끝, 붉은 노을이 브리즈번 하늘을 물들일 때, 우리는 마치 꿈을 사는 듯했다. 삶은 간단했고, 시간은 여유로웠다.
고다는 늘 말했다.
“야, 이게 진짜 사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 해도, 이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이
그저 오래된 친구와 함께 온 긴 여행처럼만 느껴졌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몰랐다.
그 느긋한 시간 너머에,
‘살기 위한 일자리’라는 현실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