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자국이 남은 스케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게 전시될 페이지

by 하안

어렸을 적부터 한 아이돌 가수를 쭉 응원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깊게 좋아해 본 적도 없다.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갈 법한 콘서트도 가 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팬심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의 추천으로 한 만화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 만화 작가의 팬이 되었다. 만화 하나 때문에 일본까지 갔던 건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진격의 거인> 작가는 후쿠오카 근처 작은 마을 히타에서 태어나 만화 작가를 꿈꿨다. 히타는 중심부의 도로도 작은 경차가 겨우 지나가는 작은 마을이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와서 마을을 가로지르는 천이 범람할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새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택시도 잡히지 않아 가까운 거리를 버스를 타고 빙글빙글 올라가야 했다. 산속 깊은 곳에 박물관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진격의 거인>을 탄생시킨 작가의 초창기 인물 스케치를 보면서, 섬세한 선에 남아있는 투박함을 발견했다. 비슷한 듯 다른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껏 팬심을 즐겼다. 모든 작품들을 눈에 다 담아가리라는 진심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케치 속에는 화이트 자국들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완벽함에 가까운 스케치에 화이트 자국이라니, 천천히 살펴보니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왜 작가는 화이트 자국이 남아있는 스케치를 박물관에 전시했을까. 나는 평소에 화이트를 잘 쓰지 않는데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항상 공책 한 페이지를 전부 뜯어내고 다시 쓰곤 한다. 왜 그런 습관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아마 처음부터 완벽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나 싶다. 작은 화이트 자국이 계속 눈에 거슬리는 게 싫었다.


왜인지 작품의 심미적인 면보다는 작가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다시 주의 깊게 스케치를 들여다보았다. 작가는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얼굴은 마음 들게 그렸지만, 옷의 질감 표현정도는 실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본인만이 아는 반복되는 실수였기에 포기하고 화이트로 지웠을까. 계속되는 스케치에 지친 나머지 급하게 마무리하려고 했을까. 화이트 자국들을 통해 작가의 마음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거듭되는 상상 끝에 화이트 자국이 그를 더 의미 있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결국 명작을 남겼음을. 어떤 이유였든지 그 시간을 버텨낸 작가의 끈기와 화이트로 실수를 드러낼 수 있었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난 아직도 화이트 자국이 싫다. 다 뜯어내고 다시 쓰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책은 그럴 수가 없다. 한 페이지조차도 뜯어낼 수 없다. 나에게는 화이트 자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인생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 끝없는 무너짐이 있었기에 명작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내 인생의 초창기 스케치를 그려내기로 했다. 나중에 보면 가장 의미 있게 전시될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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