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인 학생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내 초창기 학생 중에 한 명이었다. 홍콩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중화권 학생들이 못하는 발음 몇 개를 제외하면 한국어를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는 학생이었다. 이건 모르겠지? 하면서 가르쳐준 단어들의 상당수를 이미 알고 있는 정도였다.
크리스틴도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케이팝 아이돌과 배우의 팬이었는데, 나보다 드라마를 더 잘 알아서 오히려 내가 내용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 내용을 설명해 달라고 하면, 그 자체로 말하기 연습이 잘 되기도 하고 본인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꼭 수업을 듣던 크리스틴이 갑자기 수업을 못하게 되었다는 긴 메시지를 하나 남겨놨었다. 잘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고, 경제적인 활동을 하기 전까지는 한국어 수업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항상 퇴근을 하고 늦은 밤에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회사 생활에 진심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퇴사 후에 오히려 진로에 대해서 재탐색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회사 생활에 더 관심이 갔었다. 그녀는 사내 교육을 담당하는 직무를 했던 것 같은데, 그 일이 너무 재밌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런데 해고통보라니. 나는 인생이 아무리 정답 없는 질문의 연속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을 괴롭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원망이 가득 차올랐다. 나도 특별히 할 말이 없어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더욱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를 건넸었다.
그리고 반년쯤 되었을 때, 다시 연락이 왔다.
“이 영상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썸네일에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근황을 나눴다. 정규직까지는 어려워서 계약직으로 올해 7월까지 일을 한다는 것. 정규직 전환은 어려울 것 같고, 그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말. 그럼에도 해맑게 한국어 너무 공부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에 나는 왜 눈물이 날 뻔했을까.
“선생님은 좋아하는 일 찾았어요?”
반년도 전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우리 할 수 있어요~”
나는 초등학생 때 졸업 기념으로 타임캡슐을 학교 뒷산에 묻어놓은 기억이 났다. 타임캡슐에는 가장 소중하게 여긴 물건과 그 당시 좋아하던 남자애 이름이 적힌 종이를 꼬깃꼬깃 넣었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다시 타임머신을 꺼내서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가끔 타임머신 생각이 나면 “희망찬” 과 같은 형용사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런 느낌의 추억이 피어난다. 누구나 인생에 잔인한 질문들이 오가겠지만, 마음속에 묻어놓은 소중한 것을 잊지 말고 다시 돌아오자. 너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꼭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