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법원 영장실질심사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리사욕을 챙기고자 했으면 정치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냐며 비난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진짜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따라서 거짓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위해 한 행동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도, 미르재단의 출연금도, 최순실에게 기밀문서를 보여준 것도 모두 나라를 위하는 좋은 마음이었던 거다.
말과 행동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정도는 보편적 상식이다. 다만 문제는, 파악한 의도를 단정 지어선 안된다는 거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런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100% 그런 의미로 말한 거야.' 혹은 '누가 봐도 그런 뜻이지.'라는 식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넘겨짚는 경우는, 다름 아닌 예전의 내가 너무나도 많이 행했었다.
단정 지어선 안되더라도, 의도를 파악하려 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렇게 파악된 '의도'는 당연히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가 상대방의 언행을 그렇게 '해석했음'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예전의 나는 '나의 해석'을 '상대방의 의도'로 혼동하고 단정 지어버렸다. 많은 갈등을 파헤쳐보면 이게 문제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을 하면, 그것이 상대방의 '악한 의도'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그 상태에서 상대방을 꾸짖으면 상대방은 자기 잘못을 모른 채 억울해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그런 상황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상대방은 그런 '악한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악한 의도를 지니고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이 그런 '나쁜 의도 없었음'으로 용서되고 정당화되느냐.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 잘못을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나쁜 의도 없었음'을 파악하는 게 굉장히 효과적이다. 분명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지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던 건지, 소통 과정에 잡음이 생겼던 건지, 아니면 회의적인 내 태도가 틀렸던 건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는 바로 이 조건에서 성립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의도는 그랬을지 몰라도 다른 게(상대방의 판단, 소통 과정 등) 문제였구나'라는 이해는 다양한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곤 한다. 문제 해결에는 항상 앞서 정확한 파악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반면 단순히 '넌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아라'는 식의 소통 방식은 상대방의 잘못이 왜 잘못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변화하지 못한다. 변화의 의지가 있더라도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모르는 비극이 생긴다.
이는 결국 상대방에게 '왜 내 말이 정당한지'를 증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증명하지 못하는(객관화하지 못하는) 주장은 결국 주관에 머무른다. 머무른 주관은 객관으로 나아가기 힘들고, 보편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힘들다.
박근혜 본인은 실로 한국을 위했다. 그는 '악의'가 없었다. 다만 그 판단을 포함한 나머지가 틀렸다. 박근혜의 잘못이 교훈이 되어 사회의 보편적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그 점을 짚어내야 한다. 그런 틀린 판단은 당장 우리 각자에게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위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정말 그것을 위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악한 의도(라는 착각)에 대한 분노만 들끓는다면 성찰과 변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