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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l 16. 2021

영화 <말아톤> 리뷰

영화는 윤초원(조승우)의 나래이션으로 시작한다. 해당 나래이션은 그가 좋아해 외우고 다니는 ‘동물의왕국’의 내용이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는 수십만 마리 초식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동물들은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습니다. 저기 갓 태어난 새끼와 함께 있는 어미 얼룩말이 보이는군요. 이제 새끼에게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칠 것입니다. 야생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끼들 주변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 ”



얼룩말은 초원에게 독립성을 가지게 하는 매개임과 동시에 초원이다.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초원은 얼룩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치 애착인형과도 같달까. 애착인형은 부모와 떨어지는 분리불안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하고 서서히 정서적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한다. 어쩌면 초원에게 얼룩말은, 독립성을 가지게 하는 매개임과 동시에 본인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초원 엄마(어미 얼룩말)가 초원(새끼 얼룩말)에게 사회(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미의 품에서 서서히 야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초원 엄마 또한 초원과 함께 나아간다.



“애가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시라고요? 당연하지, 왠 줄 알아요? 당신은 초원이 없인 하루도 못 살 여자니까. 초원이가 당신 없이 못 사는 게 아니라.”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은 내가 알아서 가르쳐.”



“그러니까! 애가 엄마 허락 없이 오줌도 제대로 못 누지. 자기가 낳았다고 애들이 뭐 다 자기 껀가?”



“길러 보지도 않았으면서..!”



위의 대화는 초원의 마라톤 코치(이기영)와 초원 엄마 경숙(김미숙)의 다툼이다. 마라톤 선수였던 코치는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를 명령받았다. 처음에는 자발적 봉사도 아니었고 자폐 장애인을 맡게 되며 굉장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초원이 뛰고 난 후 본인의 심장에 코치의 손을 가져다 댄 뒤로 차츰 그에 대한 마음이 열린다. 초원 또한 (심장이 뛰는) 같은 인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인인 초원(하지만 지능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과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할당된 시간에 찜질방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경숙은 그게 못마땅했다. 코치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데리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툼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초원의 사회화를 막는 것은 오히려 엄마의 보살핌이 아니었을까. 초원에게서 동정의 시선을 덜어내고 같은 어른으로 대한 건 코치였다. 그런데 엄마의 마지막 말이 뼈아프다. 길러 보지도 않았으면서. 사회의 온갖 차별과 장애의 불편함의 몫은 엄마가 감당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엄마와 코치의 입장이 뒤바뀐다. 경숙은 초원을 끔찍이 아끼는 것이 본인이 젊었을 때 초원을 버리려 했던 죄책감 때문임을 안다. 또한 초원을 챙기느라 소외된 초원의 동생(백성현)이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며, 특히 지하철에서 의도적 성추행으로 오해받는 초원이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를 외치는 걸 보며 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 시작한다.




초원이 마라톤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자꾸만 뛰게 했는데, 나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도저히 알 수 없는 아들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최면 걸어 확신한 것이 아닐까. 결국 경숙은 마라톤을 다시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초원은 ‘제도화된 사회화(장애인 직업개발)’의 굴레로 들어간다.





하지만 초원은 뛰고 싶다. 영화가 끝날 무렵인 이 지점에서, 비로소 초원은 엄마의 선택도 코치의 선택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을 한다. 초원은 마라톤 경기 일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마라톤 경기를 나간다. 말리는 엄마의 손길(품)을 뿌리치고, 마라톤의 대열(사회)에 합류한다.



말리는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고, 마라톤의 대열에 합류하는 초원.



중간에 지쳐 주저앉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초코파이를 내민다. 그가 엄마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엄마의 보살핌(초코파이)이 있었기에 그 힘으로 초원은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했던, 당시에는 의존적이었던 사회 공간(수영장, 마트, 지하철)을 이번에는 본인의 힘으로 달려 지나간다(실제로 해당 공간을 지나간 것이 아닌,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적 샷). 훈련을 하며 마주치던 풀잎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손이 되었다. 초원은 그들과 손을 마주치며 비로소 사회의 품으로, 어엿이 독립된 개인으로서 성장한다.



훈련을 하며 마주치던 풀잎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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