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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Aug 03. 2021

흐리거나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


영화가 끝난 후,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근처 자리에 있던 교복 입은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처음에 누가 누군지 몰랐어. 흑인들은  똑같은 사람으로 보여.”



영화가 외국 영화였으니 등장인물 더러 한 말이리라. 그럴 수 있다. 처음에는 덜컥 차별적 표현으로 느껴졌으나 아직 학생인 만큼 감수성이 넓게 자리하지 못했을 수 있으며, 기분 나쁠 당사 집단도 없지 않은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리는 헤어스타일을 비롯한 외양의 느낌만 봐도 한국, 중국, 일본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유럽 사람들은 동양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시아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우리도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북유럽 사람도 동유럽 사람도, 우리에겐 모두 유럽인으로 보일 뿐이다. 분명 게르만족, 라틴족, 슬라브족 등으로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텐데 말이다.




비단 국가와 인종만 그렇지 않다. 범주(category)란 원래 그런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범주일수록 세세하게 구분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이를 ‘해상도’라 비유한다. 내가 아는 분야는 선명한 사진처럼 보이지만, 모르는 분야는 그저 뿌옇게 보인다. 사진 안의 희끄무레한 형상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힘들 것이다.





작년부터 나는 식물을 하나 집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무언가를 길러보았다. 한낱 잔풀에 지나지 않더라도 나의 관심에 이 생명의 숨이 달려있었다. 어느 날은 아래 잎이 노랗게 시들어버린 탓에 이유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결국은 화분을 한아름 들고선 근처 꽃집으로 달려갔다. 물을 많이 주어서도, 영양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하엽이 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식물 세계를 좀 더 알게 되었다. 다른 식물도 키우고 싶어져 여러 식물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때부터 길거리가 다르게 보였다. 입구 주위에 식물을 기르는 주택과 가게가 정말 많았다. 안보이던 식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비슷비슷한 풀로만 보였던 식물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이 집은 몬스테라를 키우는구나, 저 집은 뱅갈고무나무를 키우는구나.



돌이켜보면 디자인 전공인 내가 글자(폰트)에 대해 처음으로 공부했을 때도 그랬다. 고만고만해 보였던 글자들이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하나의 특징과 성격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끝내는 도심을 거닐 때마다 널려있는 간판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격동고딕으로 쓰인 선거 현수막은 자신의 의지를 뽐내보였고, 함초롬바탕으로 쓰여진 화장실의 ‘고장’은 무심함을 드러냈다. 물론, 옆에 있던 친구들은 귀신 보는 사람을 보듯이 나를 쳐다본다.



선거 현수막에는 '격동고딕' 폰트가 많이 쓰인다.



‘식물’로만 알고 있던 ‘몬스테라’와 ‘뱅갈고무나무’, ‘글자’로만 알고 있던 ‘격동고딕’과 ‘함초롬바탕’은 내가 그들을 구분할 만큼 관심이 있기 전만 해도 그냥 식물과 글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관심을 두자 각각의 존재와 특징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상도가 뚜렷해지는 과정이다. 그리고는 그것들 너머의 사람이 보인다. 글자를 만드는 사람들, 글자를 사랑하는 사람들. 식물을 사거나 팔고 기르는 사람들,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실 그것들을 평생을 그저 식물로만, 글자로만 알고 살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 세상은 너무나도 뿌옇다. 그런 세상에서는 거리의 검은 형상에 지레 겁을 먹고 돌을 던질 수도 있는 거다. 선명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굴러다니는 종이 박스임을 알고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갈지도 모른다. 혹은 그 검은 형상이 고양이었다면, 애꿎은 고양이만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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