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베갯속의 진실

미야의 글빵 졸업작품 숙제

by 하빛선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 되면서 우리 집은 살던 동네보다 조금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 이사 간 곳은 왠지 좀 더 발전된 동네 같았다. 우리 집에서 100미터쯤 걸어 나가면 새로 난 넓은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에는 현*자동차 롯*제과 등 대기업들의 지사쯤으로 보이는 멀쩡하고 큰 건물들이 몇개 버티고 서 있었다. 뭔가 현대적인 느낌의 동네였다.


1970년대 후반이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신도시 같은 곳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예전에 살던 집보다 더 현대적인 주택이었다. 그 당시 작은 공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사업이 잘 되어 형편이 좀 나아져 이사를 한 것 같았다.


이층집은 아니었지만 옥상도 있었고,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도 마당에 꽃과 나무도 키울 수 있는 꽃밭도 있었다. 예쁜 꽃들을 마당에서 키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신났다. 꽃밭에는 신기한 공벌레들도 있었는데, 나는 겁이 많았지만 그 벌레들조차도 귀여웠다.


또 우리 집 담장을 따라 누가 심었는지 자그맣고 귀여운 채송화가 줄을 지어 심겨져 있었는데 내가 대문을 나설 때마다 나 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동생과 골목에서 놀다가도 그 손짓에 이끌려 채송화를 가만히 들여다 보곤 했다. 내게 꽃이 참 예쁘다는 걸 알게 해 준 시절이었다.


우리 옆집은 국회의원집이라고 했다. 물론 우리 집보다 다섯 배쯤은 큰 집이었다. 그 집에도 내 또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도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나와는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번 그 집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옆집에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사니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초대한 것 같았다. 나는 우리집보다 훨씬 넓고 잘 정리되어 있는 정원과 널찍한 소파가 있는 커다란 응접실을 보며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집과 담을 같이하고 있었던 이 집의 담장 옆에는 작은 창고 하나가 있었다. 이웃집 아줌마들이 우리집에 모일 때면 간간히 국회의원집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 창고가 딸에게 직접 과자를 만들어 주려고 만든 과자공장이라는 것이었다. 그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집의 화려한 응접실에 다녀 왔던 차라 그 말이 거짓말같지 않았다.

'집에서 과자를 만들어 준다고? 부자는 역시 다르구나 ' 나는 속으로 했다. 우리 집과 가까이 붙어있던 그 창고에서 가끔은 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옆집 창고에 불이 났다. 자다가 '불이야' 하는 소리에 엄마는 우리를 정신없이 깨웠다. 아버지는 그 당시 사업 때문에 서울을 자주 오갔었는데 그날 하필 출장 중이셨다.


엄마는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리는 우리에게 서둘러 옷을 입히고, 집밖으로 같이 뛰쳐나왔다.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자공장이라서 기름이 많은 가봐. 불길 좀 보소. 잘 타네'


엄마와 우리는 이웃분들의 도움으로 뒷집으로 피신을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소방차가 크게 소리를 내며 도착했고, 사람들이 불구경을 위해 몰려들어 동네가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일단 뒷집으로 피하긴 했지만 내 심장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벌떡거렸다. 집이 다 타면 어쩌지? 내 책들하고 옷들은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엄마가 베개 같은 것을 가슴에 꼭 끌어 안고 있는 거였다. 우리 집에 아기가 있었나? 자세히 보니 집에서 엄마가 베고 주무시던 베개였다.


아기도 아닌데 급박한 상황에서도 베개를 놓칠세라 꼭 끌어안고 도망나온 엄마의 모습을 보고, 뒷집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엄마에게 물었다.

"아니, 베개가 뭐라고 그걸 그렇게 꼭 끌어안고 집을 나왔어요? 다른 귀중품은 안 가지고 나왔어요?"


엄마는 쑥스러운 듯 아줌마에게 베개를 보여주며 말했다.

"사실, 이 안에 내가 숨겨놓은 비상금이 있어요. 우리 집에 불이 번지더라도 이 돈이라도 있어야 아이들 밥이라도 먹이지요."라고 말하며 씩 웃는다.

그 말에 우리는 너무 재미있어 낄낄거리며 웃었다. 불이 나서 피신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자꾸 웃음이 났다.


불은 빨리 진화되었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까지 불이 번지지 않아서 큰 피해는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베개를 볼 때마다 엄마가 숨겨놓은 비상금이 있나 살펴보았다. 엄마는 비밀장소를 들켜버려서 더 이상 베개에 돈을 숨기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여전히 베개에 비상금을 숨기시는 것 같았다. 대신 비상금 위치가 다양해졌다. 가끔 덮지 않는 철 지난 이불 사이, 찬장의 그릇, 장판밑에도 돈을 넣어 놓기도 하셨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집이 넘어가서 도시의 변두리지역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을 때도 엄마는 우리에게 가난을 알려주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투철하셨던 아버지는 정해진 용돈 이외에는 용돈을 잘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베개와 찬장에는 늘 우리를 위해 작은 비상금이 준비되어 있었다. 없는 살림에서도 엄마는 늘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엄마의 비상금 장소는 늘 같은 장소였다. 마치 구두쇠 아버지로 인해 자녀들이 힘들어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함부로 그 비상금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엄마의 허락이 없이는 쓸 수 없는 돈이었지만 왠지 나는 가난하지 않은 듯 든든했다.


나는 베개를 볼 때마다 가끔 엄마 생각을 한다. 베개에 지퍼가 있는지 확인하고 돈을 숨길 수 있는지 살펴보기도 한다. 실제로 돈을 숨긴 적은 없지만 베개를 보며 웃음 짓기도 한다.


나는 엄마의 비상금이 정겹다. 그래서 나도 가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찬장 그릇 안에 작은금액의 현금을 넣어 놓는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돈이 필요할 때 나에게 전화를 하면 " 찬장 그릇에 얼마 있으니까 그거 가져가라."라고 말한다.


우리집에도 엄마의 마음을 담은 베개속이나 찬장의 그릇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처럼 거기에 비상금을 숨기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든든하고 편해진다. 아이들도 그런 든든함을 느꼈으면 했다.


이제 아이들이 모두 떠나 비상금을 사용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배갯속이나 찬장 속에 숨겨놓았지만 여차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비상금같은 엄마이고 싶다.


세상이 인색할 때, 너무 지치고 힘들 때, 어려움이 있을 때, 엄마가 숨겨놓은 베갯속 비상금처럼 말만 하면 언제든지 채워주는 그런 든든한 마음이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들에게 고백한 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