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주관적인 감정이고 가난도 주관적인 감정이다. 내가 남동생이 가난하다고 표현한 것 또한 나의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동생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남동생은 마흔 살이 훌쩍 넘어서 결혼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상시 남동생은 결혼하지 않고 연로한 부모님과 계속 살고 싶어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돈을 모아놓지 않았다는 것이 동생의 논리였지만 고생하는 부모님을 자신이 돌봐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행복도 저울로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동생은 자신보다는 부모님의 행복에 더 큰 무게를 두며 살아왔다. 어쨌든 동생은 아내와 3살짜리 아들과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동생은 최소한 경제적으로 아직 가난하다.
동생은 흔한 자동차도 없고 집도 좁다. 직장에 다니긴 하지만 성과에 따라 급여가 정해져서 월급도 적고 금액도 불규칙적이다. 자동차가 없어도 생활에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그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아버지 생신과 구정은 겨울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갓 태어난 아들을 포대기에 싸매고 지하철 역까지 20분을 걸어 나와야 한다. 1시간가량 지하철을 타고 부모님이 사시는 인근 지하철 역까지 도착한 후 다시 10분을 걸어야 부모님 댁에 도착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들을 포대기에 싸맨 후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왔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요즘은 갓난아이가 감기에라도 걸리면 병원비가 더 비싸니 택시라도 타고 다니라는 부모님의 걱정과 핀잔으로 택시도 타고 차도 렌트해서 다녀서 그나마 다행이다.
남동생은 부모님을 극진히 대한다. 어렸을 때 남동생도 나만큼 아니 그 이상 더 힘든 시절을 보냈음에도 그의 내면 아이는 상처하나 받지 않은 것처럼 부모를 향한 원망이나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내가 이상한 건지 남동생이 이상한 것인지 감을 못 잡겠다. 분명한 것은 남동생은 행복의 기준이 나와는 다름에 틀림없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내가 태어난 시골을 벗어나 대도시로 떠났다.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 까지는 시골에서 남동생과 하기 싫은 농사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매일 처리해야 할 농사일과 집안일로 허덕거렸다. 그런 와중에 난 나의 일을 남동생에게 가끔 강제로 떠넘기고 옆 동네로 놀러 간다든지 방 안에서 티브이를 본다던지 낮잠을 잤었다. 형의 부당한 지시에 남동생은 반항을 몇 번 했지만 형과의 주먹싸움에서 맞기만 하고 땅에 엎어지는 것은 본인 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형의 부당함을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부당함을 부모님께 고자질 조차 하지 않은 남동생은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착하고 착해 빠졌다.
몇 해 전 여름, 정말 모처럼 대천 해수욕장에 가족 여행을 갔다 왔다. 어머니는 한낮에 바닷가에서 손녀딸들과 놀아주었는데 몸을 무리했는지 허리와 다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숙소의 방에 누워 계셨다. 남동생은 그 당시 미혼이었다. 엄마의 무의식적인 다리 아프단 소리에 동생은 팔을 걷어 부치고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도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장난치며 아이들과 놀아 주었더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 상태였다. 내 몸은 천근이 넘는 듯 방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채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운동 에너지가 적은 눈동자만 남동생이 엄마 다리를 주무르는 광경을 물끄러미 옆에서 지켜봤다.
처음엔 동생의 다리 주무르기 효도가 흐뭇한 광경이었지만 5분을 넘기니 나의 호기심도 더 이상 버텨내지를 못했다. 내 눈은 지루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느라 피곤한 것처럼 스르르 감겼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결에서 깬 나는 아직도 동생이 엄마 다리를 주무르는 기네스북 도전 현장을 목격해야만 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무려 2시간 훌쩍 지나 있었다. 지친 쪽은 동생이 아니라 엄마였다. 동생의 손길을 벗어난 엄마는 어느새 내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남동생은 엄마 발을 엄마는 내 발을 주무른다. 삼각관계다. 간혹 나도 엄마 발을 주무르지만 10분도 안돼 지쳐 나가떨어진다. 다른 누군가의 다리를 10분 이상 주무르는 일은 웬만한 사랑과 희생정신없이는 힘든 일이다. 난 어쩌면 그런 엄마 덕분에 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성격으로 길들여졌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젊은 시절 IT회사에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팀장을 직업으로 삼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본인이 꿈꿔온 일을 하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15년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캐리커처라는 직업에 몰입하며 즐겁게 실력을 쌓아가고 있다. 돈은 크게 벌지 못하지만 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동생은 행복해 보였다.
동생은 ‘몰입’이란 책과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을 듣고 행복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마치 늦가을 한줄기 바람에 급작스레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동생은 세상을 보는 시선을 한 순간에 바꾸는 데 성공했다.
부연하자면, 동생은 삶의 욕심을 버리는 통찰을 얻었다고 말한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고 직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된다고 믿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을 하든 행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입각한 내 눈은 동생의 행동은 합리적인 경제활동이 아니라고 제단 해 버렸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인간’을 배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세상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생은 경제적 인간임을 어느 순간 포기했다. 자신보단 부모님의 행복에 무게를 두었고 부모님에게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자신의 지갑을 활짝 열었다. 동생은 삶의 능숙한 장사꾼은 아닌듯했다. 그럼에도 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서 행복하다고 늘 나에게 말했다.
난 내 삶의 상당 기간을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특히 회사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로 늘 긴장 상태였고 상사의 꾸지람에 상처 받고 힘들어했다. 그럴 때면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가장으로서 경제활동을 그만 두면 안되니 고민이라고 투덜대면 동생은 늘 이렇게 내게 웃으며 말을 돌려주었다.
형~ 건강이 최고야. 스트레스로 건강 해쳐가며 회사 다닐 이유가 없잖아. 분명 다른 일로도 먹고살 수 있을 테니 마음 편히 먹어
물론 위로가 되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내 내 머리는 경제적 계산기를 두드린다. 당장 내 월급이 끊기면 내 소중한 가족의 삶의 질이 낮아질 것이 분명했다. 딸들은 학원을 그만두어야 하고 외식하는 횟수도 줄어들 것이고 매달 부모님에게 주는 용돈도 대폭 삭감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면서 나는 흔한 현실 가장의 역할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동생과의 전화를 힘없이 끊었다.
동생도 경제적인 결핍이 주는 삶의 불편함을 매 순간 무시하며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행복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자여도 불행할 수 있다.
다만 동생으로부터 내가 배운 한 가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요즘 새벽에 일어나 이렇게 글이라는 걸 쓸 때 행복감을 느낀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