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나의 형이었다
이 에세이는 제 삶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 남동생 이름은 이문용이다.
난 늘 동생에게 빛을 지고 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미안하단 표현을 자주 말로 표현하면서 살고 있지도 않다. 술 한잔 안 걸치고는 속 깊은 대화를 잘하지 않는 수컷들만의 어색함이 한몫 거들었기 때문이리라.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을 반추해 보니, 남동생은 실질적인 장남 노릇을 하며 살아야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타 지역으로 다니기 위해서 그리고 대학 시험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난 사이 일하시는 부모님 대신 여동생을 돌봐야 했고 집안 일도 도맡아 해야 했다.
난 대학교 시절에도 군대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가족과 떨어져 자취를 하며 지냈기 때문에 남동생의 장남 역할은 지루하리만큼 길어졌다.
그래서 난 남동생에게 늘 마음 한 켠에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변명을 조금 늘어놓자면, 중학교 다닐 때 까지는 나도 남동생과 하기 싫은 농사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매일 처리해야 할 농사일과 집안일로 허덕거렸다.
그런 와중에 난 나의 일을 남동생에게 가끔 강제로 떠넘기고 옆 동네로 놀러 간다든지 방 안에서 티브이를 본다 던 지 낮잠을 잤었다. 형의 부당한 지시에 남동생은 반항을 몇 번 했지만 형과의 주먹싸움에서 맞기만 하고 땅에 넘어지는 것은 본인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형의 부당함을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부당함을 부모님께 고자질 조차 하지 않은 남동생은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착하고 착해 빠졌다.
내가 목표 지향적인 인간이라면, 남동생은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부모님의 고달픈 인생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라도 묵묵히 핑계 대지 않고 농사일, 식당 일을 도와주었고 여동생을 돌보느라 동네 친구 녀석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내 몫의 일까지 떠맡아 처리해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남동생을 보고 배우고 철 좀 들라고 나를 다그쳤지만, 좋은 음식은 전부 장남인 나의 입으로 먼저 들어가게 해 줬다. 사과를 주더라도 제일 크고 빨간 것은 나의 손에 먼저 쥐어졌고 귀퉁이가 썩은 사과는 동생들 몫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몇 달간 자취생활로 영양실조에 걸린 듯한 몸으로 내가 인천 부모님 집에 가는 날은 집안에 고기 냄새가 퍼지는 날이었다. 남동생은 웃으며 지나가는 말로 ‘형이 오는 날은 나도 호강하는 날이야 고마워”라고 말하는 동생의 넉살에 씁쓸하면서도 미안했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에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만약 우리 집에 나만 태어났다면, 엄마는 더 혹독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남동생이 나 대신 장남 노릇을 해 주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남동생을 위해서 미안하단 말 보다 나는 선물 같은 이벤트로 미안한 마음을 갚아 보고자 했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네덜란드 주재원으로 있을 동안 동생에게 비행기표를 보내어 네덜란드에 놀러 오라고 했던 적이 있다. 형이 외국에 있을 동안 며칠 여행하면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먹고 싶은 이국적인 음식 그리고 형이 일하는 곳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것이 미안하단 말의 에둘러진 표현이 되었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동생이 군 복무했던 강원도 춘천의 군부대를 면회 간 일, 동생의 기숙사 고등학교를 무작정 찾아 간일 등이 작지만 나로서는 동생에게 형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갚아 보려는 행동들이었다.
2008년 4월의 어느 봄날.
이 날은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 만들어졌는데 이 또한 내가 동생에게 미안함을 갚아 보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비참했었다.
그 당시 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꿈이란 것을 찾아보겠다고 중국 MBA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중국 MBA에 도전하려면 가족의 허락이 있어야 되겠단 판단 하에 우선 그래도 말이 잘 통하는 남동생을 설득하려고 동생과 약속을 잡았다. 만나기 전 서점에 들러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을 사서 동생에게 선물해 주었다.
동생이 자주 간다는 횟집에 들어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부모님 얘기, 꿈 얘기, 결혼한 여동생 얘기, 꿈 벗 얘기 등등. 웃고 떠들다 못난 형이 백수인 게 창피하지 않냐고 물었다. 동생도 요즘 회사 일이 힘든지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컥했다.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나 많은 주제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얘기하다 보니 술잔도 그만큼 빠르게 서로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취기가 올랐다. 앞에 앉은 동생의 얼굴이 뿌옇게 변해버리고 아른거릴 즈음. 옆 테이블 아저씨들, 아마도 50대 초반 같아 보였다. 시비를 건다. 너무 시끄럽다고, 전세 냈냐고, 동생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왜 불쌍한 내 동생이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가? 동생의 행동이 억울했다.
어느새 난 자리에서 일어났고 말싸움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술 마시면서 떠들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면서 난 따졌고 상대방은 “어디서 어린놈들이 말대꾸야? 네들은 애미 아비도 없어?”라고 소리 지르며 비꼬았다. 그 순간. 나의 주먹이 뇌의 허락 없이 뻗어나갔다. 이미 뇌의 통솔력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길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통솔력을 잃은 내 주먹은 말리던 동생의 얼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생이 날 콘크리트 바닥에 눕히고 내 얼굴을 손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억눌린 내 감정. 뜻대로 되지 않았던 지난 4개월. 그리고 부모님의 걱정 어린 핀잔과 질타. 너무나 참기 힘든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그렇게 차갑던 콘크리트 바닥이 뜨거워져갔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갈 곳을 잃고 코 속으로 들어간다.
난 뭐가 그리 서러웠을까?
내 실력이 부족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자초한 일을 누구 탓으로 돌리려 했던 걸까? 마음속의 응어리가 점점 더 커져간다. 내 삶에서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인가? 내가 비참하다. 발가벗은 내 육체를 보여주듯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내 사랑하는 동생 얼굴을 때린 것이 마음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다음날, 동생에게 힘겹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미안하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동생은 내 몸부터 걱정한다. 콘크리트 바닥에 눌려있던 나의 왼쪽 얼굴을 걱정하고 술로 속 쓰림에 고생할 내 위장을 걱정했다. 약간의 침묵.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난 다급히 한마디 내뱉는다. ‘미안해 문용아’
동생은 나보다 형이다.
엄마가 우스개 소리로 말했던 ‘문용이가 형으로 태어났어야 해’라는 말. 입이 열 개라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서류상으로만 난 그의 형이었다.
오늘따라 동생의 웃는 얼굴이 무척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