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 가족이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리고 최근 건물을 한 채 샀다고 웃으며 말을 한다. 물론 건물 구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은행 대출에 의존했지만 건물주가 된 처제가 부러웠다. 무엇보다 그 건물은 임차인 월세로만 900만 원의 임대 소득을 보장하는 황금알을 낳는 부동산이었다. 이래서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우스개 소리마저 탄생했는지 모르겠다.
출근과 퇴근길에 고속도로 옆으로 휙휙 풍경처럼 지나가는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을 보면서 '저 수많은 건물들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라고 답이 없는 물음을 던지곤 했었는데, 그중 한 명을 오늘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건물주를 상봉했다는 감격보단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왔다.
월급쟁이로 수 십 년째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부는 몸과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 월급보다 훨씬 많은 900만 원이란 돈이 가만히 있어도 통장에 입금된다니. 제대로 뼈 속까지 울리는 현타를 경험한 식사 자리였다. 처제 가족도 한때는 직장인이었지만 개인 사업자로 새롭게 출발해 수년간 갖은 고생을 해서 일구어낸 결과임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으로 먹은 소고기가 상했는지 배가 살살 아파왔다. 처제가 건물주가 되었기에 배가 아픈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맹세코. 이 나쁜 소고기 같으니라고. 나를 속 좁은 인간으로 둔갑시키다니.
EBS 채널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동네책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속초에 있는 63년 된 '동아서점'이란 동네책방에서 김훈 소설가와 지역 주민들이 함께 하는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김훈 소설가가 책을 많이 읽는데 이상한 책, 예를 들어 기술서적이나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집 등, 을 본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지만, 나에게 더 큰 의미를 준 것은 동아서점 그 존재 자체였다. 책방을 연 계기가 1950년대 허허벌판이었던 속초에 지역 주민들을 위해 책 읽을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0년대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3대째 이어져 오며 속초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3대 김영건 씨가 쓴 ‘당신에게 말을 건다(속초 동아서점 이야기)’에는 나의 마음에 콕 박힌 문장이 있다.
'강원도 어느 바다 마을 서점에서 책이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느냐마는, 책에 대한 당신의 그 애정 어린 마음 덕분에 우리 서점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돈이 목적이 아니어도 어떤 일을 선택할 때가 있다. 타인을 돕고자 하는 따뜻한 가슴으로 경제적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기도 하고, 적은 돈이지만 불우한 이웃이나 소외된 계층을 위해 기부도 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사회공헌에 관심이 높다. 특히 올해부터는 푸른 별 꿈꾸는 학교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임직원들이 지역 사회 학교와 연계하여 청소년 진로 코칭을 해 주는 봉사 활동을 추진해 오고 있다. 난 상반기에 수원시 모 중학교에서 진로 코칭 강의를 했었다. 하반기에도 임직원 대상 진로 코칭 강사를 모집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 전체 공지 이메일을 보고 선뜻 다시 지원하지 못했다. 난 상반기에 지원했기에 다른 임직원에게 기회가 가길 바랬다. 그런데 업무가 바쁜지 빈자리가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재빨리 신청했다. 며칠 뒤 수원의 모 혁신 중학교를 방문하여 강의를 했다.
주제는 공부하며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현타의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는 것, 그리고 여러분은 충분히 그런 잠재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숨어 있는 잠재 능력은 좋은 습관을 통해 몸 밖으로 튀어나오니 꼭 지금부터 좋은 습관을 실천하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강연이었다. 중학생들에게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3분의 1 학생은 대놓고 자고 있었고 3분의 1 학생은 무표정으로 멍 때리고 있었다. 순간 욱했지만 내 눈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수의 인원을 위해 준비한 강연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인사를 하고 강당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뿌듯했다. 내가 그냥 자랑스러웠다. 강연이 나에게 경제적 이득은 하나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동일 변호사는 ‘라틴어 수업’에서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지식인은 자신의 욕망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만 지식을 사용한다. 반면에 지성인은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며, 타인의 고통에 관심 갖는 따뜻한 가슴을 장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지식을 실천하고 나눔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지성인의 정의를 두세 번 읽다 보니 묘하게 세계 3대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가 강조했던 공동체 감각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처제가 지식인인지 지성인인지는 이 글과 전혀 무관함을 미리 밝힌다.
아들러가 강조한 공동체 감각이란 무엇일까?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이란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며,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인류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 감각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다. 아들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나조차도 공동체 감각이란 이타심 또는 사회적 관심을 갖고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성장을 돕고 사회 공통의 이익에 공헌한다는 의미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부끄럽긴 하지만, 나도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공동체 감각이란 의미를 외면하고 살아왔다. 돈이 없는 부모를 원망했고 돈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돈에 집착하다 보니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서 경쟁에서 이겨야 했었다. 타인의 고통보다 내 고통이 먼저였다.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어찌 남의 고통을 내 비좁은 심장에 담고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습관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실천하며 그 경험을 글로 써서 타인의 삶에 기여하고자 노력한다. 좋은 습관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의 글을 쓰려고 애쓰고 있다. 감히 짐작하건 데, 최근의 나를 물로 헹군다면 지성인의 때 국물이 조금은 흘러나오지 않을까?
나는 아직 나의 글이나 강연으로 이렇다 할 큰돈을 벌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돈이 좀 부족하면 어떠하리. 한번 왔다 가는 짧은 인생. 내가 즐거워하고, 그나마 내 능력 중에서 잘하는 일을 하는 것. 배부른 지식인보다 배고픈 지성인으로 사는 것. 이 또한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