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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용의 습관홈트 Jan 21. 2020

어쩌면 난 너의 불행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

인간이해자 라 로슈푸코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친구들의 불행 속에는 무언가 우리에게 그리 싫지만은 않은 것이 있다'

홍수가 나거나 화재가 나서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척은 하지만 도움을 주는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값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우월한 감정 속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찌그러진 인간들이다.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연민의 감정은 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3대 심리학자 중 한 명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이 지점에서 강력하게 충고한다. 다른 사람의 비극을 통해 우리가 쾌락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류라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안도하는 감정을 갖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 가난은 내 바람과는 달리 끈질기도록 우리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에게 늘 같은 말로 달래고 위로해 주셨다.

"아들아~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해야 한단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 찢어지는 법이야. 위를 보지 말고 네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대꾸했다.

“엄마~무슨 소리야. 성공하려면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해야죠~”

난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욕심만 부렸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며 안도감을 느끼라는 어머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크 피셔가 쓴 <게으른 백만장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보통 나보다 못한 사람을 옆에 둬야 한다고 말하지만, 게으른 백만장자들은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시 나의 생각이 완전히 그릇된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살다 보니 나도 별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어느덧 어머니의 말대로 살고 있었다. 내가 괴로울 때 타인의 불행을 발판 삼아 고통의 웅덩이를 기어 올라오곤 했던 것이다.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나 혼자만 힘들고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기분은 나를 두 번 죽일 만큼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남들도 각자의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최근에 나의 세 번째 책 <습관의 완성>을 출간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독자들이 좋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욕심쟁이 나의 마음도 독자들의 사랑만큼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 순위가 매일 몇 단계씩 상승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일이 내 뜻대로 어디 되던가? 상승하는 날도 있지만 뒤로 밀려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내 책 보다 순위가 더 밀려난 책들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좀 더 과거 이야기를 해 볼까? 난 한 때 입사와 퇴사를 밥 먹듯이 했다. 나만 조직 생활에 적응 못하고 도망치는 패배자란 자괴감이 들면서 입맛도 없었던 적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런데 무심코 TV를 틀었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어떤 날은 나와 같은 부적응자가 팍팍한 조직 생활을 못 견뎌서 사표를 던지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듯하여 미친 듯이 눈물이 흘렀다. 나만 조직 생활을 못하는 돌연변이가 아님을 알고 얼마나 위로받고 울었던지.

비단 이뿐이랴. TV에서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아픈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는 효자 검사 등을 보며 그들의 아픔이, 어려운 선택이, 불행이 나에게는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나는 저들보단 형편이 낫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다니, 라 로슈푸코는 허튼 말을 내뱉는 사람은 아님이 증명되었다.

반면에 알프레드 아들러는 연민이란 감정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얼마나 공감하는지를 보여주는 진실된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진심으로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감정이 바로 연민이다. 하지만 난 40년 넘게 연민의 감정은 순간이었고 그 연민의 감정 이면에 내 불행을 대면시키고 속물처럼 위로를 받고는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나보다 더 힘든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어 주고는 했다. 그렇다 보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단 수단으로 이용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연민이란 순수하고 따뜻한 감정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너의 불행히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우월한 감정 속 해방감보다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아파하고 위로해 주는 연민의 감정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연민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해야 발현된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타인의 고통에 관심 갖고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너의 불행이 더 이상 나의 위로가 되기보단 함께 공감하는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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