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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용의 습관홈트 Nov 23. 2019

20살 어린 신입사원이 건넨 위로의 맛

나는 퇴근 후 집에 가기 위해 분당선 지하철 상갈 역에 들어섰다. 지금 막 열차가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서둘러 뛰어가면 지하철을 충분히 탈 수 있다고 내 본능은 쫑알댄다. 만약 이번 열차를 놓친다면 족히 15분은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을 대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내 몸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최근 회사 일로 무척 숨 가쁘게 살고 있어서 그런지 내 몸의 에너지는 바닥이 났고 아무 의욕도 없다.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우리 팀은 프로젝트를 이끌어야 하는 부서다. 그래서 구성원들 대부분이 직급도 높고 평균 연령이 40살이 넘을 만큼 나이도 많다. 반면 신입 사원은 몇 년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역 피라미드 구조다. 그런데 이런 노인정 같은 팀에 작년 말 처음 신입사원이 배정되었다. 그녀는 90년대생이다.

난 그녀의 등장이 참 신선했다. 임원인 팀장의 눈치도 안 본다. 최근 팀장이 중요한 발표가 있었는데, 몇몇 직원들 앞에서 모의 발표를 진행했었다. 그 발표를 듣고 그녀는 팀장의 발표가 어디가 부족했는지 조목조목 웃으면서 충언을 했다. 속 마음은 모르겠지만, 팀장도 그녀의 직설적인 충언을 선뜻 받아들이는 듯해 보였다. 회의 시간엔 후드 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선배들과 회의를 한다. 그런 그녀가 처음엔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꼰대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잠자코 그녀와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녀는 놀라운 행동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난 3주 동안 사장님 발표 자료를 준비해 오고 있었다. 임원 발표 자료 준비도 까다로운데 사장님 발표 자료는 까다로움의 최고봉임을 직장인들은 잘 알 것이다. 단어 선택부터 도표의 위치와 순서 등 고치고 또 고치는 반복의 연속 작업이 화수분처럼 뿜어져 나오는 작업이다. 이런 수많은 수정 작업의 터널을 지나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런데 팀장님이 오늘 자료 리뷰 회의를 하면서 이것저것 자료 수정을 지시했다. 이틀 뒤 사장님 앞에서 발표하는 자료라 수정할 경우 여기저기 손대야 하는 장표가 많아서 시간도 부족한데, 팀장님은 더 멋진 아이디어를 발표 자료에 넣고 싶어 했다. 내가 팀장님 입장이었어도 부하직원에게는 미안했겠지만 동일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부사장도 아니고 사장님 발표자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나의 정신 상태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내 몸은 저항감을 속으로 드러냈다.  그 소심한 저항감은 스트레스로 변하더니 나의 온몸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난 내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눈이 뻑뻑하여 손가락으로 두 눈 언저리를 누르고 비벼댔다. 그리곤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누워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이대로 책상에서 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토닥거림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위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20살이나 어린 90년대생 신입사원 그녀였다. 그리고는 그녀는 내 어깨를 세네 번 토닥거리며 힘내라고 위로를 스스럼없이 건넸다. 순간 섬찟 놀라 잠이 덜 깬 줄 알았다.


20살이 넘게 차이 나는 까마득한 신입사원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날 위로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더 내가 놀란 것은 그녀의 위로가 정말 위로가 되었단 사실이다. 그녀의 위로는 추운 겨울날 허기진 배를 채우는 따뜻한 수프 맛이 났다.

 그녀는 팀장님과 내가 자료 리뷰 하는 회의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기분인지 그녀는 십분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그 회의 자리에는 그녀 말고 내 또래의 고참 남자 직원들이 3~4명 더 있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상대가 화가 났거나 슬플 때 쉽게 다가가질 못한다. 그래서 마음을 전하고 위로를 건네는 데 서툴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에도 거침이 없다. 나이와 직급은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다.

20살 어린 신입사원의 위로가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고참 직장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90년대생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고의 전환이 많이 되었다. 특히 '트렌드 코리아 2020'이란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임원 무서운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무님이요? 별로 어렵지 않아요. 솔직히 직속 상사보다 편해요. 상무님은 언제 바뀔지 모르잖아요. 일부러 잘 보이려고 굽실굽실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긴 하다. 그런데 젊은 직장인들은 공정한 관계를 중시한다. 직급이 높은 상무님은 그저 월급을 많이 받으니까 더 책임지는 일이 많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상사는 주인이고 부하 직원은 하인인 것처럼 굽실거려야 한다는 위계적 관계는 사라지고 업무의 능력이 중시되는 수평적 관계로 직장 내 풍경도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90년대생인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커다란 원인은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은 일하는 방식이나 동기부여 방법 등 모든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쌓여간 것도 신입사원인 그녀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위로를 주고받는 데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랴. 그 장소가 직장이면 또 어떠하랴. 20살 어린 신입사원에게도 난 오늘도 배운다. 그녀의 신선한 가치관이 나의 고인 물을 조금씩 씻어 내어 주길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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