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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용의 습관홈트 Oct 29. 2019

발표 불안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지난주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회사에서 조직문화 품평회 예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우리 팀의 조직 문화 담당자로 선정이 되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팀의 조직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들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회사는 매년 10월부터 어느 팀이 좋은 성과를 얻었는지 평가하고 우수한 팀을 선발하여 보상을 해 주고 있다.

첫 예선전이 지난주 화요일에 있었다. 부사장님 포함 300명 동료들 앞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조직문화 담당자로 진행했던 활동들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우리 팀이 속한 사업부에는 3개 팀이 있다. 3팀 중 1팀만 본선에 올라간다. 이렇게 본선에 올라간 최종 6개 팀이 한 달 뒤 최종 우승을 다툰다. 예선전 발표 순서는 며칠 전 사다리 타기로 결정했다. 우리 팀은 2번째로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난 강연용 또는 회사 보고용 PPT 정도는 그럭저럭 만들 줄 안다. 최선을 다해 발표 자료를 만들고 연습했었기에 자신감은 있었다. 첫 번째 팀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첫 번째 팀이 VLOG로 영상을 촬영해 시각적으로 재미를 더하고 청각적인 현장감을 더해 환호성을 이끄는 발표를 해버렸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멋진 발표였다. 아뿔싸. 문제는 고요했던 내 심장이 그때부터 허락도 없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발표할 걸’ 이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나의 뇌는 나에게 뭐라도 해 보라고 명령했다. 난 지금이 엄살을 부려야 할 타이밍이라고 직감했다. 습관처럼 말이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난 옆에 있는 3번째 팀 발표자에게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와~저 팀 발표 정말 잘하네요. 전 조직문화 발표는 첨인데 시간도 없어서 급하게 만들었어요. 우린 동영상 자료도 없고 글자도 많아서 재미없을까 봐 걱정이네요'

3번째 발표자도 맞장구를 친다. 나보고 살살하라고 부탁한다. 우리 둘은 분명 첫 번째 발표자의 신선한 발표자료에 바짝 긴장한 채 각자의 순서를 기다리는 패잔병 같았다.


내가 엄살 부린 이유는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우리 팀이 1등 해서 나의 상사가 기뻐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수고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의 욕심과 기대는 나를 더 긴장시켰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긴장감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 막연히 기대했었다. 개뿔. 나이와 긴장감은 반비례하지 않음을 이날도 뼈저리게 느꼈다. 동시에 이런 나의 욕심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니 더 떨렸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했었다. 나의 엄살 속에는 내가 못했다기 보단 상대팀이 너무 잘해서 그런 거니 행여 질책하지 말아 달라는 암묵적인 핑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뻔한 엄살이라도 해야 긴장이 풀릴 것 같았다.


순간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시계를 잠시 어제로 돌려보자. 난 어제 아들러 심리센터에서 저녁 7시에 수업이 있었다. 퇴근 후에 약속 장소로 부리나케 갔다. 그런데 센터 대표님이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업이 연기되었다. 큰 사고는 아니길 기도했다. 함께 수업 듣는 다른 선생님이 아쉬운지 커피 한잔을 하자고 했다. 잠시 목도 축일 겸 1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조직문화 품평회 발표로 걱정이 많다고 최근 나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나에게 복식호흡을 해 보라고 추천했다. 배로 숨을 쉬어 보라고 시범까지 보여 주셨다. 처음엔 잘 안되었지만 몇 번 연습하니 그런대로 복식호흡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복식 호흡하며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머리로는 나의 발표가 어떻게 끝나기를 바라는지 상상해 보라고 했다. 난 청중들이 웃고 박수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나에게 손가락을 튕겨 스냅 소리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발표하는 당일 날 무대에 오르기 전에 스냅 소리를 내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복식 호흡하며 상상했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솔깃한 조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상시 나의 뇌가 조잘대는 소리에 귀 기울일수록 몸이 위축되고 침이 말라서 발표를 망친 경험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비워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복식호흡을 하고 나니 나의 뇌가 조잘거림이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비워지니 나의 몸은 이완되고 침이 다시 입에 고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난 긴장하면 입안이 마르고 침이 증발해 버려 목소리가 갈라지곤 했었다. 그것이 발표할 때마다 나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복식호흡을 3분 정도 하니 신기하게도 입안에 침이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개처럼 내 혀는 축축해졌다. 우리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걱정이 가득 찬 뇌를 비우고 즐겁고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몸은 평온해진다.

다시 발표 장소로 가 보자. 진행자가 내 이름을 호명했다. 의자에서 일어서며 손가락으로 스냅을 튕겼다. 어제 복식 호흡하며 떠올린 청중들의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를 나의 뇌가 기억해 냈다. 앵커링이 잘 된 듯했다.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자 내 떨리는 심장이 뱉어 낸 첫마디가 우렁차게 위와 식도를 타고 목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청중의 귀에 도달하기 전에 내 귀에 먼저 착륙했다. 내 귀는 흡족한 신호를 보냈다. 내 귀가 보낸 신호를 듣고 내 심장은 안심이 되었는지 차분해졌다. 이제 내 눈은 청중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훑으며 지나갔다. 간혹 청중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 나의 발표는 만족스러웠다. 청중이 만족스러워서 나도 만족스러웠다는 표현이 맞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팀 발표자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발표 무대를 향했고 난 나의 의자를 향해 걸어가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찰나가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 데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그는 나와 일찍이 엄살 한마당을 즐겼지만 아직 복식호흡을 해 보진 못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발표를 시작했다. '앞에서 발표한 두 분이 너무 프로처럼 발표를 잘해서 많이 긴장됩니다' 이 멘트 또한 그가 준비한 두 번째 엄살이었다. 그 엄살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는 준비한 발표를 떨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발표했다.

그리고 점수가 집계되었고 본선에 올라갈 한 팀을 발표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긴장감이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내가 속한 팀 이름이 진행자의 입에서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직장 생활 17년 만에 처음 1등을 해 본 듯 기뻤다. 이제 한 달 뒤 있을 본선 무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때는 CEO 포함한 수많은 임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 얼마나 더 큰 긴장감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리라. 연습은 발표 불안을 없애는 최고의 방법임을 잘 안다. 그렇지만 때론 연습을 해도 불안이 엄습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나는 가볍게 엄살을 부려 본다. 엄살은 타인보단 나를 위한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갖으라는 최면술이다. 엄살까지 부렸는데도 나의 뇌가 걱정하며 조잘거린다면  비장의 무기인 복식호흡을 꺼내면 된다. 머릿속을 비울수록 입에 침이 고이기 마련이다.


연습, 엄살  그리고 복식호흡은 내가 발표 불안에 대처하는 자세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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