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걸크러쉬의 정석

이달의 소녀 - XX 리뷰 (2019년 2월 18일 작성)

by 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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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녀는 완전체인 12명을 완성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첫 멤버인 희진을 시작으로 3개의 유닛이 공개되었고, 이례적으로는 콘서트로 데뷔의 시작을 끊었다. 전무후무한 데뷔 프로모였다.


그 프로모의 가장 특별한 점이 있다면 멤버 12명 모두가 솔로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즉슨 그룹 활동 뿐만 아니라 솔로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멤버 12명 전체가 그렇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대단한 시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원수가 여럿이면 여럿일수록 그룹에서 파트도 적고 다른 멤버들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멤버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혹은 역량이 부족하지 않더라도 멤버가 너무 여럿이라 그 능력이 안 보이는 걸 수도 있고. 그런데 이달의 소녀는 (엄청난 자본과 함께) 솔로곡으로 멤버들을 공개하므로서 멤버들 개개인의 특색을 완전히 살리게 된 것이다. - 물론 장점만 있지는 않다. 오히려 솔로곡으로 데뷔시켜놓다보니 그룹 전체의 케미는 잘 안 보이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 더불어 리드보컬, 메인보컬과 같은 파트를 정확히 나누지 않아서 멤버들이 누구나 메인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꽤 매력있는 시도다. 더불어 각자 멤버에게 세계관을 주고 그룹 전체에 세계관을 주는 시도는 걸그룹이 '제대로' 해낸 것이 거의 처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달의 소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이제껏 반복되어온 진부한 걸그룹의 전형을 깰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달의 소녀는 Hi high 라는 곡으로 데뷔했는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주 많이 실망했었다. 첫 번째로 노래 퀄리티가 생각보다 허무했다. 멤버 각 솔로로 싱글들을 12개나 낸 그룹이 선택한 노래라기엔 많이 약해보였고, 귀에 꽂히는 것도 아닌데 컨셉도 진부했다. 두 번째 이유는 허무함이었다. 대체 이럴 거면 그렇게 뜸을 들여 멤버들을 하나씩 공개한 이유가 뭐지? 하는. 컨셉은 우리나라 걸그룹들이 이미 수만 번 반복한 귀여움과 발랄함 어딘가에 있는 컨셉이었다. 그래,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많은 자본과 그렇게 많은 투자를 했는데, 왜 다시 나온 컨셉은 결국 귀여움이야?


그리고 이달의 소녀는 2월, 리패키지 앨범 XX로 돌아왔다. 활동곡은 Butterfly. 아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나는 그들이, 이왕이면 아주 아주 성공하기를 바란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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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이달의 소녀가 지겨운 대한민국의 걸그룹 역사를 부수어버릴 하나의 키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걸그룹이 아이돌로서 시작했던 90년대, SES와 핑클은 되려 화려하고 다양한 컨셉을 가지고 컴백했다.


그런데 왜 2019년 현재, 걸그룹 컨셉은 아직도 청순, 큐티, 섹시, 걸크러쉬 중 하나인가? 왜 자꾸만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는가?

나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걸그룹 덕질을 하면서도 내가 기획사 사장이 되어 이 시장을 바꿀 그룹을 프로듀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사실이었다. 걸그룹도, 예쁘다 귀엽다에서 벗어나 '멋있다', '닮고 싶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성별에 관련 없이 엑소나 방탄소년단을 보며 '그렇게 되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걸그룹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이달의 소녀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봤다. Hi High에서의 뻔한 컨셉이 아니라 Butterfly를 들고 나온 지금부터 다시. 그들을 꾸며내서 귀여워보이려고도, 섹시해보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멋있어'보이려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넌 마치 Fly like a Butterfly
더 높이 날아가줘 Wings Wings
이대로 Fly like a Butterfly
스치는 바람 소리 Wing Wing Wing
I better be around you

이달의 소녀 - Butterfly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가사가 외치듯,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나는 나비가 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편견의 장벽을 넘어 그들의 힘으로 원하는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안무나 의상도 좋았다. 걸그룹 안무를 생각하면 짧고 간단한,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안무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butterfly 안무는 그것보다 되려 보이그룹 안무에 더 가까워보인다. 팔다리를 많이 쓰고 몸 전체를 쓰며 몸에 힘을 잔뜩 주어야 출 수 있는 안무를 짰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안무임에도 불구하고 12명의 안무가 잘 맞는다. 소위 말하는 칼군무다. 나는 이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도 멋있는 춤을 충분히 출 수 있다. 안무에 맞도록 불편한 의상은 입히지 않았다. 짧은 치마나 바지 때문에 마음 졸일 일이 없다. 이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물론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Hi High는 무대 구성도 의상도, 가사도 멜로디도 일본 걸그룹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어딘가 촌스러웠다는 뜻이다. 특히 가사가 그랬다. 가사를 몹시 신경 쓰며 듣는 내게 만두처럼 달콤하다는 가사는...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butterfly는 그런 부분이 없다. 유치하지 않다는 소리다.

몽환적인 fx 사운드와 강한 비트, 그럼에도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멤버들의 에어리한 보컬까지. 1절 코러스에서 힘을 한 번 빼고 청량하면서도 부드러운 악기 소리를 넣은 것도, 그 다음 이어지는 전주에서 오히려 비트를 강조해 댄스 브레이크를 넣은 것도 좋다. 단순한 걸크러쉬가 아니라 서정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크러쉬가 느껴진다. 물론 곡의 전개 자체가 굉장히 어색하게 들릴 수는 있다. 기승전결을 착실히 쌓아가는 케이팝의 전형도 아니고, 코러스에서 대놓고 드랍되는 이지리스닝 팝의 전형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련된 사운드와 몽환적인 멤버들의 보컬 덕에 이 곡은 왠지 자꾸 찾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다.


수록곡의 퀄리티도 준수하다.
대체로 비슷한 느낌의 곡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쉬운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앨범의 유기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 중에도 마음에 들었던 수록곡은 '위성'. 단연 곡의 중심을 잡고 있는 신스 사운드와 코러스까지 착실히 쌓아나가는 전개 방식이 좋았고, 코러스 뒤에 반복되는 챈트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달의 소녀가 대한민국 걸그룹 판도를 바꿀 키를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달의 소녀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나는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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