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리고 싶어요.
집에 돌아와서 옷이란 옷을 모두 꺼내 들었다. 가장 멋진 옷을 입어야 했다. 날이 풀렸다고 하지만 아직은 쌀쌀하다. 청바지에 카디건을 걸칠까? 양복에 넥타이 안 맨 차림은? 젊어 보이는 것은 청바지와 점퍼인데. 이러다 밤새 고르겠다. 지난번 복합상가에서 본 산뜻한 남방을 사는 건데…. 이런 벌써 12시가 넘었다. 어차피 잠자기는 틀렸다. 즐거운 상상이나 하자. 베개에 기대어 영화 채널을 돌리며 맥주 캔을 땄다. 무료 영화를 선택했다. 시간 보내기 위한 건데…. 영화가 의외로 재미있다. 좀비들이 인간을 공격하여 그들의 숙주로 삼는다. 살아남은 순수 인간 중 몇 명이 놀랄만한 사격술과 주먹 발차기로 아슬아슬하게 좀비 우두머리를 죽이고 나약한 인간들을 구출한다. 맥주와 적당히 재미있는 영화가 긴장을 불러왔나 보다. 새벽, 네 시가 넘었다. 그제야 서서히 졸리기 시작했다. 잠들기에 조금은 불안한 시간이다. 벽에 기대어 졸자. 자세가 불편하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조금만 눈을 붙이자. 역시 이불은 좋아. 잠이 들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냥 일어나자. 여섯 시 조금 넘어 이불을 빠져나왔다. 정성을 다해 샤워했다. 평소에 비누 하나로 해결하던 것을 오늘은 샴푸까지 사용해서 머리를 감았다. 왁스를 발라 7:3으로 나눌까 올백으로 넘길까? 올백은 부담스럽다. 조금만 넘기자. 뺀질거리게 보이면 안 된다. 몇 가닥을 앞으로 내려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음, 됐어. 만족스럽다. 푸른색이 나는 청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곧게 뻗은 다리 위에 올려 붙은 궁둥이,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좋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청바지 위에 하얀 면 셔츠를 입고 감청색이 나는 7부 코트를 걸쳤다. 내가 봐도 잘 생겼다. 아침은? 혜미 씨가 좋아하는 토스트와 따뜻한 캔 커피 하나면 될 거야. 무언가 먹으면서 가는 것도 괜찮잖아. 설레는 마음을 안고 회사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회사는 이런 기분으로 출근해야 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혜미 씨는 필요한 서류 봉투인 듯한 것을 가슴에 안고 벌써 과장 앞에 서 있었다. 이런 건 후배인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과장 앞에 정모가 먼저 가서 서 있고 그다음에 혜미 씨가 나타나야 하는 건데…. 아무러면 어때? 혜미 씨를 잘 따라다니면 되는 거라고 했잖아.
과장이 어서 다녀오라며 서둘러 내보냈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고속버스를 타야 한다. 정모도 혜미 씨도 차가 없다. 회사 차는 오늘 배정이 없다. 정모는 미리 봐둔 토스트 가게에 들러 따끈한 커피와 토스트 두 개를 샀다. 혜미 씨가 그런 정모를 아름다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킬 것 같다. 버스 안은 따뜻했다. 드문드문 자리가 비어 한산했다. 중간쯤에 앉았다. 혜미 씨를 창가에 앉게 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고속버스는 회사 앞을 지나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회사 건물이 오늘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적도 없다. 혜미 씨도 정모를 좋아했나 보다. 혜미 씨가 한 말이 아니다. 느낌이 그렇다. 정모와 함께 가는 출장이 즐겁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버스는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기분 좋게 달렸다. 출장지까지는 두 시간 거리였다. 버스가 평택을 지나면서부터 차츰 정모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화도 끊어 지 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단답식의 대화가 오가다 드디어 더 이상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맘속으로 주고받은 수많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버스는 음악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하나둘 커튼을 드리우고 잠을 청한다. 잠은 전염된다던가. 두어 번의 하품을 겨우 참았다. 혜미 씨도 졸린 것 같다. 자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잠들면 안 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하느님 도우소서. 정모의 기도는 벌써 꿈속을 맴돌고 있었다. 혜미 씨가 웃는 것 같다. 옆구리를 간지럽히면서 즐겁게 웃는 표정이다. 그런데 왜 대꾸하지 않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혜미 씨는 웃었는데. 가지 마. 도망가지 마. 혜미 씨가 멀어진다. 정모에게서 자꾸만 멀어져 간다.
차에서 내리는 혜미 씨의 표정이 어색하다.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고서 못 본 체해야 할 때 바로 그런 표정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 드립니다. 분홍색 표지에 금발의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는 책 표지를 보고 정모는 망설임 없이 사들었다. 그날 그 기억이 혜미 씨의 기억에서 지워져 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