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감춰진 모습
오죽하면 정모의 꿈이 어서 빨리 집을 벗어나 독립을 하는 것이었을까? 그건 정모가 군대 시절에 간절히 꿈꾼 것이기도 했다. 정모의 군대 생활이 어땠을까? 선임자가 되어서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이등병에게도 절절매었다. 제발 나를 쫓아내지 말아줘. 내 곁에, 아니 당신 곁에 잠들게 해줘. 군대 제대하면 절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나만의 공간을 만들리라. 그곳에서 편안한 밤을 밤마다 맞으리라. 초소에서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밤을 꿈꾸었다.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바로 복학을 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독립을 했다. 당연히 조그마한 원룸을 얻어 나온 날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걸 거야 하고 만세를 부르며, 그러나 표정으로는 아쉬움을 남기고 집을 나왔다. 어쩌면 식구들이 정모가 그렇게 하도록 간절히 바라고 이루어진 행운에 감사했는지는 모르겠다. 복학하고 두어 번의 MT는 갔었다. 모두 술이 엉망으로 취하여 곯아떨어진 통에 정모의 정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입사 후 회사 연수원에 들어갔을 때는 그야말로 초긴장과 최신의 처방전으로 받은 약을 먹고 갔었다. 그것도 모자라 뜬눈으로 지새운 밤 덕분에 이번에도 정모의 정체는 고스란히 감춰질 수 있었다. 오히려 밤새 뒷정리를 한 성실한 신입사원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퇴근하고 우선 머리 손질부터 했다. 동네 8,000원 남성 커트가 아닌 무려 15,000원이나 하는 가맹점 미용실을 갔다. 내일은 종일 혜미 씨 곁에 붙어 다녀야 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정모는 군대 가기 전 대학 때 몇 사람인가 사귄 적이 있었다. 과 대표가 주선하여 만든 단체 미팅. 대타로 나간 소개팅 자리 두어 번. 학교 축제 때 혼자인 것이 멋쩍어 일부러 만난 후배. 물론 깊은 만남까지 간 적은 없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복학해서는 꿈도 꾸지 못했다. 취업 준비에도 바빴지만 앗아가 버린, 아니 빼앗겨 버린 꿈을 되찾아 올 만큼 자신감이 회복되지 않은 것이 더 컸다. 잃어버린 자신감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처럼 비참한 것도 없어. 그런 경험은 이제 그만이야. 물론 깊은 만남이 밤을 함께 한다는 기대감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모의 병은 정모를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총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정모가, 자신감 상실의 정모가, 자신감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혜미 씨다. 나이는 정모보다 어렸으나 입사는 빨랐다. 모든 촉과 정보를 동원하여 알아본 결과 혜미 씨는 애인이 없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어떻게 혼자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혜미 씨는 예뻤다. 조그마한 체구에 커트 머리도 예뻤고, 청바지에 체크 남방만 입어도 어울렸다.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도 좋았고, 조그만 손목에 찬 시계까지도 예뻤다. 좋아하는 감정은 숨길 수 없나 보다. 아무런 용무도 없으면서 디자인팀에 들르고, 혜미 씨가 점심 먹는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갔을 뿐인데 다른 사람 눈에 티가 나나 보다.
“너 왜 우리 부서 들락거리냐?”
“좋아하는 사람 있냐?”
“너희 팀 밥 먹을 때 뭐하고 이제 먹냐?”
“얘 좀 수상한데?”
그냥 순수하게 물어보는 말일 수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지 대화를 위한 대화였음에도 정모가 듣기에는 들킨 기분이었다. 사랑 앞에서는 과대 해석을 하나 보다. 정모는 모든 것을 혜미 씨와 연결했다. 행동까지 연결되었냐 하면 전혀 그렇지는 않다. 알리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반대의 행동으로 나타났다. 정모를 자세히 관찰한 사람이 있다면 정모는 혜미 씨를 완전히 그림자 취급하고 있었다. 정모가 소비한 차 준비실 커피의 절반이 다른 직원들에게 타 준 것이었다. 혜미 씨는 그 많은 커피 한번 받은 적은 없다. 혜미 씨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이율배반인 것을 알까? 기심이 발동해서 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