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흔적

18.500원 지폐

by 재학

고창에 내려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열병처럼 마시던 막걸리도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기수의 자리가 아니었다. 학습지 영업도, 강둑과도 떨어져, 낯선 고장에 있는 학교를 기웃거렸다. 주막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오래된 성이 나왔다. 성곽을 돌아 집으로 가는 학생들의 자전거 행렬과 만났다. 교복 입은 모습이 부러웠다. 황금색 교표가 반짝거리는 모자, 잘 다려진 파란 반팔셔츠 가슴에 붙은 이름표도 부러웠다. 불룩한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여학생들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자전거를 탄 남학생들이 신나게 지나쳐갔다. 발판에 발이 닿지 않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타는 아이, 두 손을 놓고도 잘 타고 가는 아이. 넋을 놓고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다. 고등학교 교복, 얼마나 부러운 모습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훔쳐봐도 그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너희들처럼 교복을 입지 않았어도, 머리가 길어도 나도 학생이야. 너희들보다 훨씬 공부 잘하는 학생이야’

라고 외치고 싶었다. 외침은 눈물이 되어 나왔다. 울적한 마음으로 여인숙에 돌아오니 춘호와 대근이 험악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밖에서 보자고 한다.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불량학생들이 친구를 팰 때 하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춘호는 두어 걸음 비켜서 돌부리를 차고 있고, 대근이 나선다. 비스듬히 서서 물어보는 자세가 여차하면 발차기를 할 태세다.

“너 돈 있으면서 왜 안 내놨어?”

순식간에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기수가 체육복 바지 재봉선 속에 꼼꼼히 숨겨 놓은 500원 지폐를 흔들어 댔다.

“이건 내 돈이야.”

그 돈은 뺏길 수 없다. 야간열차를 타려고 집을 나서는 기수의 손에 쥐어 준,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올까봐 외면하며 받은 어머니가 준 돈이다.

“너희들은 사무실에서 돈 받았잖아.”

“나는 전혀 받지 않았어.”

“그리고 그건 내 돈이야.”

화날 때 또박또박 조용히 말하는 사람은 무섭다. 기수가 그랬다.

순식간에 주도권이 바뀌었음을 셋 모두 깨달았다.

춘호가 대근이를 어깨로 건들며 내려가자는 눈짓을 했다.

기수는 돈을 뺏기지 않았다.

그들도 심성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다. 셋 모두 본능이 앞서는 시기를 걸어가고 있었다.

기수와 친구들은 더 이상 고창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돈이 떨어졌다. 학습지 영업을 계속할 수도, 그렇다고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고 여인숙을 나섰다. 걱정거리 없는 여인숙집 아들은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어진 것에 대한 서운함 뿐인 얼굴로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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