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흔적

21.어머니 없는 집

by 재학

꽤 피곤했나 보다. 몸과 마음이 격심한 변화를 겪었으니 그럴 수 밖에. 잠을 깨니 밖이 훤히 밝았고, 두 친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마루는 어젯밤보다 작았다. 저 작은 곳에 어떻게 그 많은 식구가 앉아 밥을 먹었을까.

가족들은 일하러 나간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춘호는 가족들이 일하고 있다는 밭을 간다고 사립문을 나섰다. 그 뒤를 대근이도 따라갔다. 기수는 딱히 가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이 집 식구들이 보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집에는 기수와 어린 조카 둘만 남았다. 가방에서 학습지를 꺼내 조카들에게 주었다. 신기해했다. 첩첩산중에서 컬러로 인쇄된 학습지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조곤조곤 가르치는 데 집중을 잘 해 주었다. 그렇게 학습지 한 장을 풀었을 때 두 친구가 들어서더니 가자고 했다. 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 하나 달랑 짊어지면 그만이라 쉽게 떠날 수 있다. 기수에게 달라붙어 학습지를 풀던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슬픔으로 덮였다. 그 새 정이 들었나 보다. 기수의 마음도 아팠다. 춘호는 조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립문을 나섰다. 기수는 학습지 몇 장을 더 꺼내 조카의 손에 쥐어 주고 뒤쫓았다. 그렇게 이상한 가족과의 만남은 끝났다.

춘호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어머니의 부재는 무능한 아버지의 무관심과 함께 춘호를 동네 말썽꾸러기로 만들었다. 산길을 걸어 다니는 학교 통학로가 춘호의 놀이터였단다. 재너머에서 오는 아이들, 계곡을 건너오는 아이들 모두 춘호에게 통행세를 바쳐야 했다. 책보따리와 주머니 속의 물건이 춘호의 손으로 넘어가는 횟수가 늘면서 춘호가 학교를 결석하는 날도 늘어갔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학교가 아니라 산으로 갔다. 산을 휘젓고 다니다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밭 가장자리 묘지 옆에 드러누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춘호에게 통행세를 내야 했다. 결석 횟수가 늘고, 춘호의 호주머니가 아이들에게서 뺏은 물건으로 채워질수록 담임선생님의 보호자 호출이 빈번해 졌다. 춘호에게 시달림을 받은 아이들의 부모가 학교와 춘호 가족에게 항의했다. 얼마 후 춘호는 자발적 퇴학을 했고, 무작정 서울행을 했단다.

“우리 아버지는 오히려 좋아했을 거야.”

“형? 그 새끼는 신경도 안 써.”

그렇게 떠난 집을 춘호는 다시 돌아와서 한 번 더 어머니의 부재를 확인했다.

“어머니 없는 집은 오는 게 아니었어.”

산모퉁이를 돌면서 춘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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