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바닥난 계획
궁박한 처지가 춘호의 본성을 깨웠나 보다.
동네 아래가 화양계곡이었다. 여름철이라 계곡가에 텐트도 보이고 바위 옆 평상에는 사람들이 수박을 옆에 놓고 화투판을 벌여 노는 모습도 보였다.
셋은 모래밭에 쳐 놓은 텐트 사이를 호기심 가득한 불량스런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계곡 아래 민박집 조그만 방에서 잤다. 그 모든 것을 춘호가 해결했다. 능력 있는 친구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마당가 우물로 채웠어도 이 동네에서 얼마나 화려한 시절을 보냈는지 밤새 떠들다 잠이 들었다.
‘사람은 배운 대로 풀어 먹고 산단다.’
어머니가 입에 자주 담으시는 말이다. 어렸을 때 기수는 어머니를 따라 밭 일을 다녔다. 조용히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한마디 없이 일할 때면 어머니는 기수를 상대로 말씀 하셨다. 어쩌면 고단한 노동을 이겨내기 위하여 흙을 향하여, 호미에게 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기수는 어머니 말씀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어쨌든 배워야 한다.’
그 배움을 갖으러 서울로 왔다. 그런 기수가 첩첩산중 계곡 민박집에 뒹굴고 있다. 한 마을이 서너 집으로 이루어진, 오후 4시면 집 앞에 솟아 있는 산 너머로 해가 져 벌써 어둑해지는 산골에 있다. 친구들이 허름한 민박집 건넌방에서 쪼그려 잠이 들면 기수는 계곡 모래밭으로 갔다. 텐트 앞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보이고, 작은 전축이 부서져라 지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는 더벅머리도, 무엇보다 발걸음을 잡는 것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웃는 얼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음식 흘린 아이의 입을 손으로 닦아주며 미소짓는 모습이 좋았다. 눈물이 흐를까 봐 하늘의 달을 쳐다보다 저절로 엄마라는 소리가 나왔다. 하염없이 계곡을 오르내리다 달빛도 차가워진 때에 맞춰 민박집에 돌아오면 땟국물로 얼룩진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친구들의 등허리가 보였다. 기수도 방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봄옷 그대로인 그들은 갈수록 허름해져 갔다. 겉모습보다 주린 배가 더 문제였다. 춘호의 능력도, 능력보다는 계획도 바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