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기수
문득 돌아가고 싶은 나이가 있다. 열일곱. 가장 많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0%였던 나이, 무슨 일을 해도 좋았고, 하지 못할 일이 없어 보였던 나이 열일곱 여덟 살로 돌아가고 싶다. 후회 없이, 다시 한번 전력 질주 하리라.
회상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시기가 있다면 열일곱 나이 때라고 말한다. 허허벌판에 홀로 길을 찾던, 의지할 곳은 오로지 스스로였고, 홀로 묻고 홀로 답했다.
학습지 일도 두 달이 지나고 있다. 계절은 봄으로 바뀌었다. 호기심 가득한 서울 생활도 무뎌졌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차라리 걸어 다녔던 조바심도 나아졌다. 사무실에서 춘호, 대근의 관계로 편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수가 끼어들기 전 둘의 관계는 친구라기 보다는 형과 동생의 분위기에 가까웠다. 춘호가 형이었다. 고향이 괴산인 춘호는 키가 작고 마른 몸매에 당돌했다. (나중에 춘호네 시골집을 갔다) 나이가 세배나 많은 사장이 밀리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봉천동을 더 뚫어봐.’
‘사장님, 한 번 훑은 동네는 시간이 지나야 해요.’
‘응, 그래? 고개 너머는?’
‘거기는 개인 붙이지 학습지 아녜요. 시장 조사 다 하고 다닙니다. 예~’
개인? 아 개인과외라는 거구나.
말주변도 좋고 요령도 좋았다.
이천이 고향인 대근이는 뽀얀 얼굴과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멋들어지게 입고 다녔다. 눈웃음을 살살거리며 말했다. 언제나 춘호 뒤를 졸졸거리며 따라다녔다. 학습지 가방은 물론 아이스크림도 먼저 먹게 했다. 춘호도 자연스럽게 베어 먹었다.
둘 사이에 기수가 끼어들면서 파동이 생겼다. 사실 기수는 혼자가 좋았다. 골목을 혼자 다녀도 외롭지 않았다. 하염없이 미림천을 걸으면 자유로움이 밀려왔다. 물론 일부러 혼자이기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학습지 가방을 메면 춘호, 대근, 기수 순서로 사무실을 나섰다. 어깨를 나란히 골목으로 들어설 때 춘호가 가운데 섰다. 춘호는 그런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대근이는 춘호에게 잘 맞았다. 기수는 혼자여도, 셋이 함께여도 상관없었다. 둘 사이를 일부러 멀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데도 영향을 주나 보다.
사람은 표현하지 않아도 표출하는 분위기가 있다.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가까이 있으면 편한 사람이 있고, 수많은 시간을 함께해도 옷깃 스치듯이 가까이 해도 편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춘호와 기수는 서로에게 긴장감이 없었다. 온종일 대화 몇마디 없어도 서운한 감정 없고, 어깨를 나란히 앉아 있어도 그냥 편했다. 일부러 꾸밀 필요가 없는,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기수의 성격이 그 친구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그에 비하여 대근이의 마음은 기수에게 노출되었다. 그 친구는 질투의 방법으로 기수를 무시하고, 때로는 밀어 내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중학교만 마치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처지가 같은 세 친구는 외톨이가 되고 싶어도 그렇게 둘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외로운 열여덟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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