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기수
난곡을 누구는 추억의 달동네라 하고, 산비탈에 지어져서 산동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70년 대 후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난곡에서 학습지 배달을 했다. 배달보다는 영업이 맞겠다. 아니다. 그냥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춘호와 대근이는 누우면 발과 머리가 벽에 닿는, 입구에 ‘달방 있음’이라는 푯말이 걸린 여인숙에서 생활했다. 베니어합판에 황토색 니스가 반질반질한 여인숙 문을 밀고 들어 가면 고만고만한 작은 방이 많았다. 복도 맨 끝방이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작은 창문으로 지하철 공사 현장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붉은색 벽돌에 하얀 슬래브 지붕을 한 양옥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언제부터였지? 기수도 몇 부 안 되는 학습지 배달을 마치면 그들이 있는 여인숙으로 갔다. 아무렇게나 누워 만화책, 무협지를 보다 기수가 들어서면 엉덩이만 들썩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저녁까지 뒹굴거리다 사무실로 들어갔다. 기수에게 그런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좋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지속될 수 없다. 그들의 아지트를 찾는 날이 줄어들고, 몇 번인가 더 가고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종아리가 당길 때까지 골목을 걷고 걸었다. 다리가 아프게 걸어도 밖이 좋았다.
학습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매고 골목을 걷다 보면 고향 생각이 났다. 이 동네는 옛 정취가 남아 있다. 팔도 사투리가 다 들렸다. 서울 사람이지만 시골 티를 벗어 내지 못한 모습도 좋았다. 걸음이 멈추는 곳은 난곡이었다. 신림동이라고 하는 것보다 난곡이라고 해야 빨리 알아들었다. 타 본 적이 없는 버스 종점에서 올려다보면 판잣집이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이어지고, 두 사람이 비켜 지나기 힘든 골목이 나왔다. 중간에 셀 수 없이 많은 집의 입구가 골목을 향하여 작은 판자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어떤 집이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여야 들어 갈 수 있게 처마가 낮았고,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어쩌다 늙은 할머니가 수채에 요강을 비우고, 흘러내린 콧물이 볼 양쪽에 달라붙어 말라버린 얼굴로 마당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수돗가에 아이 혼자 있었다.
집은 위로 올라갈수록 낮고 작았다. 하염없이 골목을 돌면 꼭대기가 나왔다. 헐벗은 공터 둘레에 노란 개나리가 많았다. 저층 아파트가 산 아래에 보이고, 오른쪽과 왼쪽의 모습이 달랐다. 멀리 도로 가운데를 따라 지하철 공사가 길다랗게 이어지고 맞은편 언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양옥이 끝없이 많았다. 옛날에 산소 자리였을 언덕에 앉아 발아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금쯤 고향 마을은 앞뒤 산에 진달래가 온 산 가득 피었을 것이다. 그 사이를 여러 종류의 새들이 노래하고, 논두렁에 매어 놓은 어미 소가 달음질치는 송아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아버지 얼굴도 떠오르고 머리에 수건을 맨 어머니 얼굴도, 동생들도 떠올라 잠시 눈물을 훔치다 내려오는 날이 많았다. 난곡 산꼭대기. 좋아하는 장소였냐고? 그렇지 않다. 혼자 울기 좋은 곳이라 자주 갔다. 그렇게 울고 나면 부모님 생각 동생들 생각이 가셨다. 서울은 맘껏 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난곡을 얼마나 자주 갔는지 세어 보지 않았다. 자주 갔을 것이다. 그렇게 울다 내려와 또 걸었다. 하염없이 골목을 걷고 걸었다.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왔는데 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한자로 썼으면 더 어울렸을 ‘남아입지출향관’을 굵게 써 놓고는 했다.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난다고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크게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서울 생활이다. 한시도 놓지 않는 가방 속에는 중학교 때 입은 반소매 체육복, 그 체육복과 한 벌인 흰색 바지와 졸업할 때 학생회장을 한 공로로 이사장상으로 받은 수학 사전, 영어 사전이 들어 있었다. 한동안 펼쳐본 적은 없지만 잠시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기수의 십대 시절이 그 가방과 함께 서울 남쪽 골목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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