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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 만나는 선택의 순간

24. 기수

by S 재학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인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어렴풋이 알아채면서 그 순간을 맞기도 하고, 많은 경우는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그 순간이 갈림길이었구나 하고 알아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몫이다. 절대자의 의지, 조상의 돌봄이나 개인의 역량 여하에 따라 그중 하나의 길을 밟아 간다. 기수는 용케도 행운의 길만 밟아 왔다고 자부한다. 한발 한발 심사숙고하여 내디딘 결과다. 타고난 성향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월급의 달콤함에 빠져서 공돌이 생활이 즐거웠다면, 학습지 사무실에서 자장면 시켜 먹는 재미가 몸에 붙었더라면, 여인숙 달방의 도색잡지 뒤적이며 낄낄거리는 것이 거슬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런 생활이 길어져 몸에 익을 만큼의 시간을 보냈더라면 스스로가 그런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더라면 지금 모습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문득 아찔한 계곡을, 아슬아슬한 담벼락을 잘도 건넸구나 싶다.


학습지 가방 메고 골목을 방황하는 시간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하루는 춘호가 내일 올 때는 가방을 챙겨 오라고 한다. 어차피 챙길 가방은 언제나 들고 다니는 이것이 전부다. 춘호 말에 의하면 사장이 서울은 학습지 시장이 포화 상태라 지방을 개척해야 한단다. 그래서 선발대로 우리 셋이 지방을 다니며 시장 조사도 할 겸 학습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수에게 서울이든 지방이든 지금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성공을 위한 여정에 불과하다. 날짜가 지난 학습지와 전단지가 더해져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나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장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출발했다.

기수가 고향을 떠날 무렵 동네 앞으로 중앙분리대가 없는 2차선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햇살 좋은 날이면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까맣게 포장된 길을 그레이하운드라는 이름의 고속버스가 달렸다. 옆구리에 다리와 꼬리가 기다란 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다리꼴 창문으로 승객의 모습이 보였다. 저런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멀어져 가는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았다.

고속버스를 탄단다. 춘호를 따라 터미널로 갔다. 사다리꼴 창문이 아니어서 아쉬웠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수많은 버스 중에 우리가 탈 버스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했다. 예쁜 유니폼을 입은 안내양 누나는 어쩌면 그렇게 친절한지.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고 도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우리 버스를 추월해 가는 승용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환상의 시간이었다. 버스 속도가 줄어들고 조그마한 공터로 진입했다.

고창. 왜 고창이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사장 고향이었을까? 춘호가 터미널에서 아무 버스나 타서 이렇게 되었을까? 서울보다 더 낯선 곳으로 왔다. 버스가 멈추고 잠에서 깬 춘호가 입가에 흘린 침을 닦으며 일어설 때 우리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적했다. 두 대의 버스가 서 있고, 매표소 앞 의자에 운전수 아저씨만 앉아 있었다. 셋을 내려준 버스는 천천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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