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우 Oct 28. 2022

폭삭 속았수다

남편이 해마다 가을이면 친구랑 손잡고(가지는 않겠지만)제주도를 갔다. 첫 해에는 별 생각이 없었던 듯 했고, 두 번째 해에도 간다기에 또???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뭘 또 가? 못 갈 건 뭐람. 지금 와서 나는 못 갈 건 또 뭐가 있지 생각하지만 그 때의 나에게 제주도는 큰 맘을 먹고 몇 년에, 평생에 몇 번 가면 많이 가는 곳이었다. 사실 그 때는 주변에 이렇게 자주 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 싶고.



그리고 나는 피해의식이 쩔기 때문에 그가 제주도를 간다고 해마다 말할 때면, 아니 그럼 애는 나 혼자 다 보란 말야?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누가 보면 기저귀 차는 아이 키우는 줄 알겠지만 그렇지는 않았고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그가 며칠 집을 비운다 해도, 주말을 끼고 비우긴 하지만 그 주말도 나는 친정엘 가거나 아니더라도 아이 둘이서도 잘 놀고, 다 무시하고 어쨌든 며칠만 버티면 시간은 지나가기 때문에 마음을 넓게 써도 될 일이었으나 그리도 속좁게 굴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사과는 아니지만 양해의 말씀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들도 돌보고 해야 하는데 고생 좀 해. 덕분에 잘 다녀올게 같은 말 말이다. 아마 할 생각이 있었겠지?하지만 매번 뾰루퉁한 내 반응에 남편은 한결같이 말했다. 너도 가. 자기도 가. 당신도 다녀오면 되잖아. 왜 자꾸 부정적으로 대하는 거야?



올해는 마라도, 가파도, 우도를 가고 한라산 등반을 함으로써 나름의 계획을 다 달성하는 해라고 했다. 추자도 가는 배를 수리를 한다던가 하는 이유로 거길 못 갔으니 내년에 또 가야 겠다는 소리에 너그러워질랑말랑 하는 내 맘이 또 좁아지긴 했지만.. 또 가? 사실 나의 이 심해 보인다 하는 꼬장꼬장함에는 유치하나마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만 말하면 더 좀스러워 보이므로 생략을 하고..



글을 쓸 거라고 책상 앞에 앉아 저번에 사 둔 복권이 당첨됐나 확인이나 해 볼까 하고 서랍을 열었더니 여권 같이 생긴 게 하나 보였다. 올레 패스였다. 남편이 올레길 여행을 계획하면서 공항에서 받을 수 있게 신청해 둔 걸, 내가 찾아다 줬었다.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도장이 착실하게 찍혀 있다. 그렇구나, 이 패스를 손에 쥐고 있으면 나라도 이 면면을 빠짐없이 채우고 싶겠다. 제주도 일 잘하네...



몇 장 넘겨보다 맨 뒤를 봤더니 '폭삭 속았수다' 라는 글이 보여서 순간 놀랐다. 뭘 속았다는 거지? 하고 다시 보니 밑에 뜻이 적혀 있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란다. 그러게, 본인 좋자고 다녀온 거겠지만 폭삭 속았수다. 라고 회사에 있는 그에게, 밤에 볼 거지만 굳이 여기에다 인사를 남긴다. 나중에는 까먹을 것 같아서..



작가의 이전글 소풍날엔 삼시세끼가 김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