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까지 그러한 종류의 눈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강렬하게 반짝이면서 방황하는 듯한, 집중적이면서도 동요하는 그렇게도 정신적인 눈을.
ㅡ전혜린 이야기 中
전혜린은 1965년, 수면제 과용으로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녀 또한비범한 천재들의 요절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그녀는 당시 환란의 한국사회에서 이례적으로 1955년, 21세 때 독일유학을 다녀온 후 모교인 서울법대에서 독일어 강사로 출강했으며 전도유망한 번역가였다.
그녀가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독일에서의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세이와 사후 발간된 내면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란 에세이도 색 바랜 채 서가에 꽂혀있다.
특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세이는 중학교 시절 독일 슈바빙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좀체 육체에 걸칠 옷치레에 관심 1도 없는 단벌로도 주눅 들지 않는 젊음의 파릇한 생기로써 철학과 삶과 정치를 논하는 자유로운 설전의 분위기와 그녀가 이방인으로서 점차 그라데이션으로 적응해 가는 생활과 매력적인 고찰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후에 알게 된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읽고서는 끓임 없이 한탄하는 권태에 대한 회피와 평범한 것에의 수치 어린 알레르기 반응과 수면제와 두통약에 의존하는 자멸스런 자해와 특별한 자아에 대한 광적인 추구로 빼곡한 것에 피로도를 느낀 것도 이면의 사실이다.
전혜린은 에니어그램 9 유형 중 특별한 자아를 추구하는 이, 우울한 자아, 예술가 4번 유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의 고착 (자신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은 세상에서 나만 결핍되었고 가치가 없다는 자아감이다.
여기서 에니어그램이란 고대 현자들로부터 전수되어 온 인간이해의 틀로써, 인간을 9가지 유형으로만 획일화 놓은 게 아니라 유형 별로 고착된 한계를 성숙해 나가면 성격에서 인격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영성적인 의미를 지닌 도구이기도 하다.
4번 예술가 유형인 전혜린은 평범함을 거부하고 특별한 자아상을 높이 상정하고 이상화한 후 내면의 검열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깊은 수치심과 절망을 느낀다.
" 나는 절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생은 나에게 평범과 피상의 것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중세와 대리석을 동경한다.
그릴파르쩌의 '절대 세계'를 나는 나는 동경한다. 무섭게 깊은 사랑,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 죽고 싶은 환멸까지......
일상생활의 평면성이, 내용 없는 인간들이 나를 질식시킨다. 나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들은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은 밖으로 투사되어 별 탈 없이 사는 보통의 사람들을 피상적 존재로 내리깔면서도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에 시기심을 느끼는 양가감정을 지니게 된다.
오래 살다보면 「별일 없이 산다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은 아닌 것」 임을 그녀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불꽃처럼 짧았던 생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전헤린은 한 때 순수한 이데아(idea)의 수정(受精)을 통해 충만한 초월적 합일을 나눴던 상대의 이별편지에 이런 말로 답장을 고한다.
" 나는 한 마리 독수리가 날아온 줄로 알았더니 날아간 것은 한 마리 참새였어!"
특별한 상대에게 실망하면 냉소적으로 신랄해진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신기루임과 동시에 이상화시킨 허상에 불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시니컬하게 상대를 평하며 자조한다.
높은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나와 타인을 바라볼 때 4번 유형의 구원자에 대한 환상의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4번 유형은 삶을 경험할 때 남과 비교하거나 특별하고 극적인 드라마를 기대하지 않을 때라야 담백한 일상을 평정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높이 설정된 자아상에 대한 아교칠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내면의 결핍감과 고립감과 자기 파괴에까지 이르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함을 성찰하여야 한다.
<에니어그램 도형>
에니어그램의 도형을 보면 4번과 5번 사이에 연결이 없이 까마득하게 아래가 비어있다.
이 빈 밑바닥은 삶의 어둠을, 블랙홀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4번 유형은 삶의 덧없음의 허무를 어렸을 적부터 느끼고 사색가인 5번 유형은 어렸을 적부터 허무를 안다고 한다.
4번 유형은 심해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용기와 창조적 통찰력을 지녔기에검은 우주와 같은 어둠을 과거의 윤색 없이 오롯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빛의 존재이다.
이들이 어둠을 비극적 요소로 해석하는 에고(ego)의 단편적인 지각의 베일을 벗겨내어야, 어두울수록 동이 밝게 번지듯,어둠은 빛을 밝히는 배경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면의 결핍에 환영의구름이 지나가도록 곁을 내주며 틈을 수용할 때 평화의 별빛이 반짝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