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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Oct 02. 2024

과녁을 맞추는 것보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아야지

별일 없이 산다 12화

30대 질풍노도의 팔자 센 시기,  바람 잘 날 없이 휘몰아칠 때면  헝클어진 마음 머릿결 엘라스틴 케어하고 널뛰는 파도에 삼켜지지 않게 서핑을

함께 즐겼던, 지금은 종적이 묘연해 흥신소에 사람 찾기 의뢰하고픈 친구가 어느 날엔가 보내준 짤이 있다.

(네가 애인이 안 생기는 이유라고)


당시 44킬로를 결코 추월하지 않는 느릿느릿 주행하는 메마른 몸의 소유자였다.

사실 마음이 깡말라 어떤 감정의 주유(注油)에도 촉촉 보습이 되지 않는 건어물녀다.


더 정직해지자면 독야청청 이 구역의 비구니로 불렸지만, 실상은 독야 청승맞게 하악질 하는 앙칼지게 길들여지지 않는 성마른 내면었다.


외롭다고 징징 울지 않는다.

심심하다고 킬링타임으로 친구를 불러내 그르릉 치대지 않는다.

 폐쇄하고 귀는 문호개방한다.


무표정 기본값이지만 속은 수많은 회로로 인풋을 하는 따뜻한 기계지라 남자사람(관계 설정값으로 이 관계를 연인이라 한다지요)과  5년을 만나서야 비로소 친해져 만면한 미소라는 아웃풋게 되었다.






고독을 와작와작 저작(咀嚼)하며 살아다.

삶도 이 씹는 행위와 심신은 무관하지 않아, 꼭꼭 씹는 사람은 내면이 날씬하지만 대충 씹어 삼키는 사람은 에고(ego)가 비만해지기도 하고, 때론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른 비만형이라는 모순된 자아상을 가진다. 

근래 한 달을 환절기 가을을  핑계로 마른 비만 쪽으로  불건강해진 체질을 인지한다.

불균형을 알아차림, 여기에서 다시 시작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인지하는 맛이  다르다.

허기진 외로움은 눈앞의 밥상머리에 코박아 아구아구 제대로 씹지도 않아 소화불능을 호소한다.

하여 인간관계 밥상에서 남흉으로, 말 그대로 타인이 나에게 영양가 없다 치면  반찬투정으로 씹어댄다. 거친 이빨로 무뚝무뚝 남을 씹느라 정작 본연의 맛을 모르고 대충 삼킨다.

맵고 짜고 디단 자극적인 맛을 추구한다, 욕망한다.


고독은 간이 세지 않  담백 맛으로서 숟가락 뜨고 젓가락이 집느라 옥신각신 과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소한의 양념으로 본연의 맛이 드러나 심심하고 슴슴한데 ,  스님들은 이 간소한 밥상에 심심(甚深)한 감사를 느낀다.



인적 끊긴 산사에서 뱃골 마음골 심심할 때 먹는 이 심심한 맛은 심심(甚深) 감사 일킨다. 자신의 내면과 재료의 성정 동떨어지않은 본연의 맛.

고독은 고 곱씹 체내에 흡수되어 마음에 긍정의 동그라미가 나이테로 새겨진다.

이렇듯 도심에서 소처럼  깊은 성찰을 되새김질하고 곱씹으니 내면에 힘줄이 불끈불다는 후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사람은 오직 나 자신만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성정이 성마르지 않고 각자의 체형에 맞게 건강하다면  수없이 쏘아지는 큐피드의 화살이 비껴짐 없이 적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사랑의 큐피드 화살만 있을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작위로 쏘아 올리는 숱한 화살에 상처 입기도 한다.


또 다른 화살 관련 해서 불교에서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격하려 벼르고 벼루었던 화살은 상대를 언제나 아프게 하기 마련이다.  같이  째 화살은 나와 무관하게  내 인생에  노크도 없이 무단침입해 오기 십상이다.

불안과 불쾌함, 시련과 사건과 갈등으로 발등에 생채기를 낸다. 어디서 날아온 지도 모른 채 동동거리게 하는 첫 번째 화살. 외부에 일어나는 온갖 드라마의 품이 된다.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에 대한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스스로에게  다시 쏘는 화살이며 첫째 화살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반영이다.

아야! 화살을 누가 쏘아 올린 거야. 아파!라는 즉각적 반응이 첫 번째 화살이라면, 이에 반해 두 번째 화살은 처한 상황 그 차체로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개별적인 나의 해석에 비롯한다.

젠장. 그 애가 날 멍청하게 봤어. 이건 나를 무시하는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첫 번째 화살은 인생사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고 또 계속 일어날 여정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화살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밑바탕이라면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에 대한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스스로에게 쏘는 화살이다.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포착되는 일부  불안 신경증적인 강박관념을 지닌 이는 손톱 거스러미가 지저분하다면(사건발생) 그냥 깎으면 될 것을, 많은 현대인들은 뭉툭 제거하거나 틈틈이 신경질스레 손톱밑을 물어뜯는다. 끝내 피까지 본다(스스로에게 쏘는 화살)


몇 달을 고독을 꼭꼭 씹지 않아 소화불량인 채로 만나게 되면 불량식품의 인연이 닿게 된다.

나는 며칠 전 깊고 좁은 인간관계망에서 한 명을 마음 밖으로 류시켰다.

4개월 언니 동생하며 살뜰히 지내왔었는데 하얀 이빨을 드러내어 활짝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원래 무뚝뚝한 편이기도 하고 관심사가 귀에 들어와야 말이 빠르고 명랑해진다.

그 외엔 피곤해진  눈. 장시간 노출됨에 심신적 피로도가 오롯이 드러난다.

비록 나와 관심분야는 달랐지만 그녀는 타인에게 살뜰 친절했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우아한 취향이어서 나이의 간격은 있었지만 친밀감이 그 틈을 메꾸었다. 

이순(耳順)의 나이이기에 어떤 말에도 발끈하지 않고 수용하는 순한 귀라 생각했다.

겉모양은 모양일 뿐이었던가.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내 앞에서 보이는 그녀의 모든 행동과 말은 치밀하게 계산된 가면극이었다.

녀와 웃고 말할 때 찰나에 드러난 나를 향한 증오 눈빛을 3번 목격한 뒤로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못 찾은 형사처럼 집에 돌아와서도 그 서슬 퍼런 증오의 눈빛을 몽타주로 삼아 에니어그램과 mbti 도구를 통해 영혼의 지문을  추적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성격 심리역동의 메커니즘을 머리로만 이해했었는데, 그녀를 통해 그 사례에 드는 유형의 건강할 때와 불건강할 때의 차이를 현장(?)에서 목격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갑자기 나를 타깃으로 십 원짜리 저렴용 쌍욕기본안주로 사람들에게 뒷담화로 씹어 소문이 내 귀에까지 도달했을 때 전혀 화나지는 않았다. 솔직히 누가 날 미워하든 좋아 둘 다 관심 밖이다.  국이 맛있단들 모든 입에 맞을 수 없다는 명심보감의 쿨한 멘트를 곱씹으며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다. 남이 내 욕을 해도 내가 그 욕을 받지 않으면 욕은  것이 아닌 것이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았다.

모든 게 내 탓이라며 스스로 상처를 후벼 파는 자학적 착한 사람 콤플렉스도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후시딘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후  까마득 잊어버렸다.

타인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보다는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에 집중하다 보니, 살다 살다 나는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비록 시절인연은 다했으나 내 인생에서 맛깔난 메서드연기로 나를 깨우쳐 주는 학습기회를 줬으니 말이다.






마음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억지로 도 닦는 사람처럼 근엄하고 친절의 가면을 쓰면 위선적이게 된다.

그냥 판단과 심판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경직된 어깨가 펴진다니까. 함 해봐~


(낼 폭우 내린다니 나뭇잎 우산 어떠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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