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다시 나를 안아줘: 사랑에 대한 실존적 기도
재생오류 떠 댓글에 링크 달았어요
밑에서 감상하세요
https://youtu.be/b02sNeqYMI4?si=J2lET5UdBJSdaXrt
물질로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는 쉽게 잊는다.
존재란 고립된 하나의 섬이 아니라
타인의 응시 속에서 드러나는 그림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 위로,
심규선과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는 속삭인다.
“부디 그대 나를 잡아줘 /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제발 이 거친 파도가 날 집어삼키지 않게”
이 절규는 단지 감정의 분출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경계선에서 울려 퍼지는 존재의 진실이다.
불안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부여잡을 수 없다.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처럼",
우리는 세계 속에 던져지고,
그 안에서 의미를 갈망한다.
그 의미는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너’의 품에서 생성된다.
그대가 나를 안아줄 때,
나는 나의 뿌리를 느낀다.
아니, 나는 존재한다.
“제발 이 거친 바람이 나를 넘어뜨리려 해
저기 우리 함께 눈물짓던 / 그때 그 모습이 보여”
공감의 기억은 존재의 증거다.
우리는 함께 울었고,
그 눈물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 순간, ‘나’는 닫힌 자아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어 다시 태어난다.
“그때 그 모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열린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기억이다.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나는 그 기억에 기대어
나를 붙잡는다.
“그래, 그 순간 하나로 살 테니”
시간은 흐르지만,
특정한 ‘순간’에 응축된다.
그 순간이 있었기에 나는 이후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본질보다 앞선다.”
하지만 이 노래는 되묻는다.
혹시, 사랑이라는 경험은
존재에 본질을 부여하는 예외는 아닐까?
사랑은 감정 이전에 실존의 본질이 되며,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거울이 되어주는 유일한 사건이다.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고 /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이 절실함은 단지 외로움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살기 위한 간청이다.
타인의 품 안에서만 완성되는 존재,
그 사랑의 부재는 단지 ‘이별’이 아니라
생명의 일부가 소거된 상태다.
마치 신 없는 세계를 처음 인식한 니체의 인간처럼,
사랑 없는 나 또한 구심을 잃고
불안 속에서 휘청인다.
그럴 때,
우리는 기억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시 세우려 한다.
사랑은 단지 머리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순간들이다.
함께 걷던 길, 잡았던 손,
흘러내리던 눈물이
시간 속에서 휘발되지 않고
생의 기반을 구성한다.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 이제 잡은 두 손을 다신 놓지 마, 제발”
두 손의 접촉은 단순한 육체적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약속이다.
내가 혼란한 세계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 손은 나의 뿌리이며 닻이다.
‘손을 놓지 말라’는 절실한 요청은,
‘나를 지워버리지 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실존을 확증받는 가장 깊은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의 가사는,
이별 이후의 후회가 아니라
존재의 경계에서 울리는
철학적 탄식이자 기도다.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아줘.”
이 말은 단지 ‘돌아와 줘’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체가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는 외침이다.
그 안아줌이 없다면,
나는 다시 미끄러질 것이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의미 없는 무한함 속에서
자유는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낙하다.
사랑 없는 자아는
조용히 붕괴한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연인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철학의 노래다.
‘나’를 구해준 타인의 품에 대한 찬가이며,
존재가 부유할 때,
우리를 다시 제자리로 이끄는 기억의 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