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세계의 도시를 여행하면서 글자가 가리키는 의미가 아닌 글자 그 자체에 집중해 본 적이 있는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여행하며 표지판과 지하철의 서체가 변했다는 걸 느낀 적은? 벽에 붙은 혹은 간판의 글자가 너무 예뻐 사진을 팡팡 찍은 기억은 있는가? 또 서울의 거리에서 글자체를 의식하면서 걸은 적이 있는가?
이 책의 저자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은 각 나라의 서체를 따라 이탈리아 베니스, 독일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영국의 런던, 스코틀랜드, 스페인 그라나다와 말라가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뉴욕, 대한민국 서울, 홍콩, 터키 아나톨리아 등 세계를 여행한다. 오직 서체의 변화와 특징에만 집중하면서. 여행하면서 예쁜 간판 사진을 찍은 기억은 있지만, 그저 낯선 풍경 중 하나였고, 심지어 내가 살아가며 매일같이 마주하는 도시에서도 서체를 유심히 관찰한 기억은 없다. 이 책 덕분에 잘 몰랐던 글자체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퍼라는 직업을 알게 됐고 서체가 시대별로 나라별로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해 왔는지, 그 나라와 도시의 지역색을 어떻게 반영하는지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세계 여러 도시의 사진들도 곳곳에 들어가 여행 욕구까지 채워 주는 혹은 일으키는 책이었다. 누구는 서체를 만들어 주는 디자이너에게 고마움을, 또 너무 몰라 줘서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발제자 포를 포함해 정, 영, 옥, 우 다섯 명이 오붓하게 줌에 모여 <글자 풍경> 뒷 이야기를 나눴다.
지인이 술김에 기분이 좋아져서 선물로 준 에펠탑 사진과 <글자 풍경>
Q. 책을 읽은 소감부터 말해 볼까요?
우: 재미있게 읽었고 중간에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 나와서 잠깐 몰입감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서체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영: 글자를 테마로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글에만 집중했지 서체에 집중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한 두가지 실용적인 서체만 쓴다. 장식이 많은 서체가 실용성은 떨어지지만 삶의 여유를 줄 수 있다는 말도 흥미로웠다.
포: 나는 유럽 여행할 때 서체의 변화를 느꼈다. 특히 스위스로 넘어가면서 서체가 변하는 걸 봤다.
옥: 내가 모르는 전문가가 쓴 책이 짱이구나.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여행하면서 좀 유심히 볼껄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었다. 스위스에서 서체의 변화를 느끼긴 했지만 별로 의식하지는 못했다. 평소에는 돋움체만 거의 사용한다. 다양한 폰트에 무관심했던 게 미안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정: 나는 디자이너와 폰트 문제로 늘 싸웠다. 나는 가독성의 입장에서 폰트를 보는 사람이라 많이 충돌했다. 눈으로 보긴 했지만, 잘 몰랐던 부분을 잘 설명해 줘서 좋았다. 모든 서체에 이름이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서체 하나를 만들려고 저렇게 노력을 하는구나 알게 됐다. 아모레퍼시픽 일을 할 때 자기 회사 서체를 자꾸 고집해서 열받았는데, 이제야 왜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는지도 알 것 같다.
포: 그 글자가 자기네 정체성을 만드는 거니까. 우리도 그 서체를 쓸 수 있어. 뒤에 표기만 해주면 되니까. 외국은 영화가 나오면 폰트를 다 만드는 것 같다.
옥: 영화 자막을 만들 때 원하는 폰트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무료 폰트를 많이 쓴다.
정: 영화 자막에서 촌스러운 서체를 계속 쓰는 게 신기했다.
옥: 무료라서 쓰는 걸 거에요.
Q. 책을 읽으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나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됐다.
옥: 커피 자국 남는 거 귀여웠다.
정: 3차원적인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좋았다. 판결문의 서체에서 흥과 홍이 헷갈려 운명이 달라진 이야기도 놀라웠다. 시력 검사표도 타이포라는 데 놀랐다.
옥: 동판 인쇄 설명해 주는 부분도 좋았다.
영: 독일이 통일하며 동베를린의 표지판이 낡을 때 당연히 서베를린의 서체로 바꾼 거.
정: 시나리오 공동 작업을 할 때 같이 작업하는 작가와 선호하는 글씨체가 달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질 때가 있다. 원고가 오갈 때마다 각자 선호하는 서체로 바꿔놔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라고 물었다. "난 그 서체가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내가 양보했다. 그 서체가 프린트했을 때 더 예쁘긴 했다.
영: 우리나라도 남북이 통일하면 그렇게 되겠다. 정치, 경제, 산업, 교육 같은 큰 부분뿐 아니라 서체까지 맞춰야 하면 조정해야 할 부분이 어마어마하게 많겠다.
포: 명조와 궁서체가 일본식 이름이다. 바꾼 이름이 왜 하필 바탕일까? 더 예쁜 이름도 있었을 텐데.
정: 그건 다 전문가들이 고민 끝에 정한 이름일 거야. 설마 괜히 정했겠어?
포: 이 책 읽으면서 이 작가가 들여쓰기한 걸 눈치챈 사람이 있나? 책 디자인 자체가 잘됐다고 생각했다.
우: 나는 사실 이 책의 디자인이 두 가지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문의 길이를 왜 이렇게 길게 했을까'와 '소제목을 왜 본문 크기보다 작게 했을까' 그게 의문이었고 마음에 안 들었다.
포: 본문에 집중하라고 소제목을 작게 쓴 것 같고, 책 접히는 부분에 글씨가 있는 불편함을 없애려고 양쪽 여유를 많이 둔 것 같다. 그리고 가로쓰기가 유독 거슬렸다.
옥: (포에게) 폰트를 만드세요!
영: (역시 포에게) 까뽀에이라체를 만들어 주세요. 동작을 활용해서요.
포: 아이고, 허리야. (일동 웃음)
우: 디자인 이야기 나온 김에 표지 디자인과 표4의 서체 이야기도 해보자.
왜 저런 강아지와 토끼 그림을 서체에 넣었는지, 왜 다 같은 서체만 썼는지 궁금했다.
옥: 나도 처음에는 표지가 되게 심심하고 읽기 싫은 표지였다.
정: 이 저자가 인문학책으로 자기 책을 포지셔닝했고,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적응하면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 글을 잘 써서 너무 좋았다. 디자이너들이 책을 예쁘게 하는 데만 너무 집중해 독서를 힘들게 하지만, 내용을 중심으로 사진을 배치해서 좋았다. 사진과 글이 내가 원하는 그 자리에 딱 있었다. 이게 저자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의 디자이너들과 달리 글도 너무 잘 쓴다.
영: 나도 유정언니 의견에 동의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요소를 넣는 걸 경계했던 것 같다.
포: 내용을 위해 사진을 옮겨서 배치했을 것 같다.
정: 맞아. 완전히 자기가 장악하고 작업했을 것 같다.
영: 우리나라 간판 서체가 정리가 좀 되면 좋을 것 같다. 너무 난잡하다.
포: 서체를 지정하는 건 반대지만 좀 정리가 되면 좋겠다는 데는 동의한다.
나는 오히려 간판들의 서체를 너무 일률적이라 그렇게까지 통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정리는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약국 간판에만 빨간색을 쓸 수 있는 규정이 있기도 하다.
영: 정말 중요한 글씨를 읽을 수 있게 서체 크기나 색을 좀 제한했으면 좋겠다.
옥: 가이드가 있어도 어글리해질 수 있다.
영: 요즘은 동네의 옛날식 간판이 예뻐 보이더라. 세리 미용실 같은.
우: 아이폰 유저 인터페이스의 폰트 변천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고, 갤럭시와 비교가 된다. 일반인들이 과연 그걸 알아챘을까?
옥: 도로 바닥 서체가 되게 마음에 안 드는데, 많이 자제했구나 싶었다. (웃음)
영: 도시 디자인이나 서체를 만드는 데 수학적인 머리가 필요하구나 싶었다. 일본 바닥 표지를 새길 때 차가 달리는 속도까지 고려해서 디자인한다는 게 놀라웠다.
포: 사실 그건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다.
정: 나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포: 실생활에서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 가독성을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와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 특히 인디자인 작업할 때.
유정: 그건 디자이너가 게을러서 그래. 바꾸기 싫은 거지!
포: 그게 양쪽 맞춤을 해놓으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광고주가 무조건 예쁘게 해달래서 그런 거야.
디자이너 혼자 싸우려니 힘들구만. (일동 웃음)
포: 한글날 외국인들이 모여 운다고 합니다.
일동: ??????
포: 진짜야! 한글이 너무 좋아서 운다고 해요.
일동: ??????
정: 가짜뉴스? 사실 한글을 수출하는 나라는 극소수라고 합니다.
포: 윌리엄 모리스체도 너무 예뻤다.
옥: 예전 세계명작 소설에 들어가는 삽화가 너무 엉망이었다. 원본에 있는 걸 좀 넣지?
정: 계몽사 같은 데?
옥: 맞아요, 맞아.
좋아하는 문장을 좋아하는 서체로 타이핑해 벽에 붙인 정
포의 취향은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로 쓸쓸히 묻혔다. 엄마 집에 저런 분홍색 보자기가 많은 것 같아 집에 가면 한번 뒤져보기로 했다! ㅋㅋ 글을 다루는 사람들은 확실히 텍스트의 가독성을, 그림을 다루는 사람은 반대로 미적인 관점에서 텍스트를 다룬다는 차이를 확인했다. 다들 일할 때는 선호하는 서체 한 두가지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이번에 과제를 하면서 이런저런 서체를 적용해 보며 지금껏 몰랐고, 평생 쓰지 않을 서체가 참 많구나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책에서 봤던, 엄마가 떡을 써는 동안 컴컴한 방에서 글씨를 쓰던 한석봉 선생의 서체는 지금 봐도 참 예뻤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는 날, 나도 각 도시의 서체를 유심히 보며 다녀봐야지 생각했다. 이번 주에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서울의 표지판, 도로, 간판에는 어떤 서체를 주로 사용하나 유심히 한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