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기회균형 입학생 12명의 이야기 - 그들은 기균충이 아니었다
유상훈 씨(가명·24)는 점심식사 내내 손목시계를 수시로 들여다봤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작이 굼뜨다”는 타박을 듣다보니 생긴 버릇이다. 고깃집 서빙부터 막노동판에서 벽돌짐 지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3번의 휴학. 지금은 졸업을 1년 반째 미루고 취업준비중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꿈이 없다”며 “어디든 취업해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 씨는 서울대생이다. 충남의 한 일반고를 전교 2등으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육사)에 진학해 장교를 꿈꿨다. 그러다 정원 외 전형인 기회균형특별전형(기회균형)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기초생활수급가정에서 자란 그는 ‘저소득층’ 대상자였다.
하지만 서울대 입학 후 아버지처럼 따르던 고교 은사를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때 육사를 갔으면 어땠을까요?” 유 씨가 되물었다.
‘메뚜기 알바’에 학업까지 이중고
서울대 기회균형전형은 올해 10년을 맞았다. 학력과 계층의 대물림을 막자는 취지로 2008년 도입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1500명가량이 기회균형을 통해 서울대생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기회균형 입학생 비율을 현행 5%에서 7%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기회균형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학생들의 호소가 곳곳에서 나온다. 심층인터뷰를 한 기회균형 출신 서울대생 12명(2명은 졸업생)은 “학내에서의 차별을 느끼지 않는 장치들만 보완된다면…”이라고 말했다.
유 씨는 중고교 시절 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다. 경제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다른 친구들은 쓱쓱 문제를 풀었다. 결국 경제학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전공을 택했다.
그에게 조별과제가 있는 수업은 최우선 기피대상이었다. 친구들이 “아 또 상훈이랑 같은 조 됐어. 망했다~”라는 말을 한 때부터였다. 웃어넘겼지만 위축됐다. 모임에서 거수기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 ‘낯선 사람들에게 내가 기회균형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매학기 수강신청을 앞두고 유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강의계획서를 살피며 조별과제가 있는지 살피는 일이었다.
김정은 씨(21·여·가명)를 친구들은 ‘바쁜 척 하는 아이’로 부른다. 입학 후 그는 생활비 걱정을 놓아본 적이 없다. 기숙사를 배정받지 못해 하루 4시간 경기 지역에서 통학했다. 휴대전화 대리점 아르바이트부터 과외까지 병행해야 하는 ‘메뚜기 알바’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껏 쓸 수 있는 돈은 월 20만 원이다.
김 씨는 어머니가 최신형 노트북을 사주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2년 전 1학년 1학기 성적이 나온 뒤였다. “친구들은 다 노트북을 쓰는데 나만 손 필기를 하느라 못 따라갔다. ‘시험 망친 건 다 돈 없는 엄마 때문’이라고 말을 했는데… "
김 씨는 같은 학과 친구들이 ‘과잠(학과 점퍼)’를 입고 MT를 가던 때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도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 바쁘다고 핑계를 댔다. 그는 “입학 후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며 “나도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은 21살의 여대생”이라고 말했다.
“'기균충'이라고 말 안 해도 제가 부족한 거 알아요”
기균충. 기회균형 출신들을 벌레(蟲)라고 부르는 표현이다.
올해 4월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엔 ‘기균충=운으로 들어온 지적 능력이 의심되는 애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표현이다. 익명에 기댄 일부 서울대생들은 스누라이프나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 대나무숲’ 등을 통해 확산했다.
‘역차별’ ‘내가 들인 노력과 성취에 흙탕물 튀기는 존재들’ ‘기균 어차피 들어와서 적응 못 한다’ ‘중경외시(중앙대 경희대 한국외대 서울시립대)도 못 갈 정도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제도를 통해 들어오는 것’ ‘사회 배려자들은 문신 같은 거 받아 놓으면 좋겠다’ 등. 정원 외 선발전형이라는 점을 비꼬며 ‘(기균이 학교 들어오는 거나) 학교에 잔디 깔고 들어온 거는 (같은 거냐)?’와 같은 표현도 눈에 띄었다. 서울대 A 교수는 “심화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자신과 동등한 기준점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열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기균충은 낙인이었다. '요즘도 낮에 농사짓고 밤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아냐'는 비난성 글은 기회균형 학생들에겐 현실이었다. 김 씨는 “언젠가 본 그 표현이 내 이야기 같았다”고 말했다. “현실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내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2012년 서울대 기숙사에선 한 공대 신입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회균형으로 입학했던 그는 평소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서울대의 한 교수는 “학업 고민과 주변의 시선을 못 견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김 씨는 말했다. “기균충이라고 말 안 해도 알아요. 우리 스스로도 부족한 걸 잘 알고 있어요.”
기회균형 내에도 존재하는 계층 문제
기회균형 내에도 계층이 있고 구별의식이 있다. 크게 저소득층과 농어촌 출신으로 나뉘는 구분 속에서 상층부는 저소득층 출신의 특목고와 자율고 출신들이 차지한다. 또 농어촌 출신 중에는 가정 내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학생들이 이른바 '금수저'다.
특목고와 자율고 출신 학생들은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고교 때부터 부족했던 부분은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 방과 후 수업을 통해 보강할 수 있었다. 외국어고는 영어는 물론 제2, 3 외국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경북 경산시 출신의 김규형 씨(가명•27)은 농어촌 출신이지만 이른 바 '부농'이다. 그는 “중고교 시절 월 60만 원짜리 과외수업과 인터넷 강의를 통해 선행학습을 했다”고 말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은 월평균 2000만 원을 번다. 이들 중 ‘교사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도 비슷한 환경을 경험했다. 교사 전형은 교사 부모를 둔 농어촌 지역 출신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대 입학본부의 한 교수는 "지역의 중고교 교사 부모를 둔 이들은 높은 교육열 속에서 사교육 경험을 갖는다"며 "수시 입학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도 많이 하는 편"이라고 밝혔다.
이들에겐 '기균충'도 ‘일부 생각 없는 학생들이 쓰는 말’이었다. 이 씨는 “당시 수능 성적만로도 서울대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에게는 기회균형이 조금 더 유리한 관문이었다. 그는 “다른 기균 출신들도 잘해서 기균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인문계열 출신이 성적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차별만 극복하면 계층사다리 복원 기회”
교육은 무너진 계층 간 사다리를 복원하기 위한 주된 수단 중 하나다. 올해 초 졸업한 이민재 씨(가명·26)는 국내 2위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는 “우리(기회균형 출신)는 수능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다”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노력하고 성과를 내는 잠재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1학년 때는 차별적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1년의 대학 생활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형의 구분은 ‘칸막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고 난 뒤부터다. 서울대 로스쿨에 진학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는 사례도 있다. 2008년 서울대가 기회균형 전형을 도입할 당시 교육의 수월성과 균형성을 모두 잡겠다는 의도가 실현된 경우다.
실제 기회균형 학생들과 다른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 사이의 성적격차도 크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에 따르면 2013∼2017년 서울대 기회균형 입학생(805명)의 성적은 상승 곡선을 그린다. 1학년 1학기 평균학점은 3.01로 전교생 평균(3.24)보다 낮다. 하지만 4학년 2학기에는 기회균형 학생의 평균학점(3.40)이 전체 평균(3.46)과 거의 차이가 없다. 서울대 B 교수는 “기회균형 학생을 위한 영어 수학 등 기초과목 학습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히 어울리도록 심리적 지원이 필요함을 방증하는 데이터”라고 말했다.
기회균형 학생들에게 대학은 일종의 기회다. 다만 그 기회가 온전히 작동하려면 학생들 스스로가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 대학과 정부가 기회균형 속 '사각지대'를 살펴야 하는 이유다. 다수의 저소득-일반고 출신들이 처한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현재 서울대는 입학 전 캠프, 일대일 개인지도 프로그램 운영, 기초교양 학습 등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김 씨는 “내가 그 프로그램을 들으러 가면 기회균형 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꼴인데 누가 가고 싶겠느냐”고 말했다. 학교나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개인의 노력 부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각지대 속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담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C 교수는 “학생들에게 맞춤형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체계는 지속적인 상담 속에서 만들어진다”며 “학생들의 장기적인 심리 추적을 통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 입시제도 속에서 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전형 구분’도 없어져야 한다. 정시와 수시는 물론 수시 전형 내부에서조차 지역균형, 일반, 기회균형 등으로 나뉜 것이 결국 학생들 사이의 출신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행정 편의적인 분류가 만든 결과다. 서울대 D 교수는 “기회균형이란 이름으로 계속 선발하면서 이들만 지원하면 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차별을 없애지 못한다. ‘중고교 무상급식’ 논란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제도는 유지하되 수시라는 하나의 큰 틀에서 학생에게 해당되는 여러 항목들이 선발 과정에 투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학내의 학업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보편 기초교양교육의 도입 등 학제개편도 필요하다.
"우리도 꿈이 있는 학생들이에요. 전 고등학교 선생님이 돼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보듬어 주고 싶어요." 김 씨가 눈물을 닦으며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