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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이형아 Jan 18. 2018

현장에서 '옐로 키드'까지 찾을 여력은 없다

기레기와 옐로키드에 대한 짧은 생각


   1889년 미국의 신문왕이라고 불렸던 조셉 퓰리처는 자신이 발간하던 <뉴욕월드>의 일요일자 신문에 한 만화를 연재토록 한다. '호건의 골목길(Hogan's Alley)'. 민머리에 노란색 파자마 차림의 꼬마는 옐로 키드(yellow kid)라는 이름으로 주말마다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좌충우돌 행보는 때론 저속한 발언과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로도 표현됐다. 그럼에도 독자들의 눈은 늘 그를 향했다. 일주일을 기다려 그를 보려던 사람들 탓에 ’옐로 키드 앓이‘도 자연스레 나왔다. 다른 신문사들의 관심사은 어떻게 하면 이 꼬마를 자신의 지면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에 맞춰졌다. 결국 옐로키드 영입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뉴욕저널>.  허스트는 호건의 골목길의 작가인 리처드 아웃콜트에게 웃돈을 주고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 뒤로 옐로키드는 상당히,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상업성이라는 전도된 목적 앞에 자기들끼리 다투는 언론을 비난하면서다. 옐로 키드도 하나의 표상이 됐다. 잔혹하거나 엽기적인 범죄, 성과 관련된 내용처럼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언론이 유희와 선정성에 매몰됐다며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으로 매도했다. 당시 퓰리처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표현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이즈음 자극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대중이 왜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냐며 비판받는다. 옐로 저널리즘과 기레기는 이 시대에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닌다.  



  얼마 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딸의 친구를 집으로 불러 수면제를 먹이고 성적 학대를 일삼다 살해한 이영학 사건이다. 자살한 부인 대신 성적 욕구를 풀 대상이 필요했다는 것이 그의 범행 동기였다. 하지만 이영학의 범행 동기를 알 방도가 없는 기자들은 그를 둘러싼 배경과 그의 과거 행적을 따라가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짚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가다 보니 이영학은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성범죄를 벌여온 전력이 있었다. 죽기 전 아내를 성매매 현장에 뛰어들게 하기도 했다.  성에 대한 인식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랐다. 뒤틀린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기자들에게 범행동기를 추론하는 단서가 된다.


  2011년 여중생 2명이 고등학생 22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2016년 뒤늦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범행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 범행 수법, 가해자들의 수는 일종의 퍼즐 조각이었다.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 빈틈이 생긴다. 가해자들의 악마같은 잔혹성은 무뎌지고 '도대체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하기 어려워진다. 작은 것 하나는 때론 간접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가해자들의 범행 동기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서를 모아 그림을 완성해가다보면 결국 선정성이 남는다. 그리고 현장을 뛰어다니며 퍼즐을 모은 기자들은 어느 순간 기레기가 돼 있다.


  많은 이들의 생각처럼 기자는 모든 것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수사기관도 큰 사건일수록 협조대상보다는 미묘한 긴장 속에서 갈등관계를 갖는 경우가 더 많다. 발로 뛰며 모은 정보는 간접적이기에 늘 검증 대상이다. 조사 내용을 감추려는 이들과는 다툴 수밖에 없다. 피의자 조사 권한이 없는 쪽은 더 사실에 근접해 보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놓칠 수 없다. 간접 증거를 들이밀며 "사실이 맞느냐" 묻고 수사기관의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현장에서 할 일이고 그 팩트 한 조각을 타사보다 먼저 모으려다 보면 보도경쟁이 생긴다. 수사기관보다 앞서서 많은 이야기를 꺼내버리면 수사기관도 감추기 어려워진다.


  보도경쟁 때문에 옐로 저널리즘이 나타난다는 말은 지나치다. 현장 기자들의 보도경쟁의 배경엔 충실한 보도를 위한 욕심과 오보가 싫어서라는 자존심이 함께 있다. 사건이 터지면 현장 기자는 사건을 재구성 하지 옐로 키드를 그리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담겨야 자극적이게 되고 그래야 더 재밌어진다’는 생각은 없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240번 버스기사 오보'를 옐로 저널리즘의 사례로 든다. 2014년에는 '세월호 전원 구출 오보' 때도 그랬다. 모두 사안을 엄밀하게 따져 확인하지 않고 성급하게 보도한 것이 문제였다. 간접증거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탓이다. 왜 검증하지 않았느냐는 꼬리물기 질문에는 기자가 게을러서, 한쪽의 말이 더 신빙성 있어보여서 등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고 언론의 상업성을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한 게 아니다.


  옐로 키드 앓이 중인 사람들은 일요일만 기다린다. "제천 화재 참사 당시 소방이 여성이 많은 2층에 진입하지 않은 것은 소방관들이 남자이고 여성혐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이들에겐 일요일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본질을 따라가보면 자극적이다. 그 이유로 가려지면 대중들의 머릿 속엔 의문이 남는다. 수사기관의 발표에 불신을 표하면서 머릿 속 의문을 지우길 바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옐로 저널리즘을 등판을 기대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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