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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독시책

삶이 미치도록 복잡하다면 철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by 하다

❝실천은 모든 존재를 살아 있게 만든다. 역기를 자주 들면 근육이 생기듯, 윤리를 꾸준히 실천하면 당신이 세상에 가져다줄 선도 늘어난다.❞ _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 p154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아르떼뮤지엄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수학여행인지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고 있더군요. 남자 학생들 한 무리가 거대 토끼 조형물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있기에 우리도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학생에게 조심스럽게 사진을 좀 찍어줄 수 있는지 물었는데요(요즘엔 사진 찍어주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 학생이 저를 멀뚱멀뚱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휑하니 가버리더라고요. 단체로 움직여야 하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했어요.


저도 내 갈 길이 바쁜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곤란했던 경험이 있는데요. 그래도 기분 좋은 그들의 여행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은 마음에 찍어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내 시간을 조금 투자해서 베푸는 이런 소소한 친절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까요? 그분들은 상투적으로 감사하다 말하고 그 일을 지나쳤을 테지만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 않았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 앞으로 누군가에게 사진을 부탁할 때 더 위축되거나 웬만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될 거 같아요.

다소 극단적이지만 이런 상상은 어때요? 어떤 다혈질의 사람이 저와 같은 거절을 경험한 뒤 무안함과 민망함이 일종의 분노로 바뀌게 되는 거죠. 그(편의상 ‘그’ 일뿐 남성을 칭하지는 않음)는 화가 가시지 않아 돌아가는 길에 차를 거칠게 몰고요. 가족들도 불편한 마음에 왜 이렇게 운전을 거칠게 하냐고 한소리 합니다. 그는 지적을 받자 더 기분이 나빠져 급커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핸들을 확 꺾다가 그만 펜스를 들이받고 맙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촘촘하게 연결된 사회에 살고 있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특히 많이 느끼는데요. 전혀 모르는 타인이지만 언짢은 내용으로 통화를 하면 어쩐지 듣는 저도 기분이 불편해지더라고요. 자리를 뜨거나 이어폰을 찾아 끼우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를 안고 짐까지 든 엄마를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되죠.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그의 저서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에서 ‘좋은 사람은 많은데 세상은 왜 이리 나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바쁘고 경쟁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현대 사회에서 잃어 가고 있는 우리의 ‘인간성’을 되찾을 방법을 제시합니다.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내가 왜?”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네요.

그는 마약과 비슷한 행복감을 주는 빠른 행복(승진, 쇼핑, 게임에서 승리, 좋은 성적 등)은 윤리적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이벤트에 당첨되어 상금을 받아서 기뻐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딪혀 내 옷에 커피를 쏟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몇 초 전에 느끼던 행복은 순식간에 짜증에 점령당할 겁니다. 이런 양은냄비처럼 순식간에 끓었다가 식는 빠른 행복과 달리 작정하고 계획해서 가질 수 없지만, 내가 태도를 보이고 ‘선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서서히 느리게 부풀어 오르는 ‘느린 행복’이 가치 있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선의 평범성은 도대체 뭘까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특정 시간이나 장소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게, 다소 과한 무관심과 편의주의와 원칙주의로 시작해 슬금슬금 퍼져나가는 것을 말하죠.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선 또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퍼져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선의 평범성이 악의 평범성을 대항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매일, 지극히 개인적인, 지역적인,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말이다.❞ _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 p28


그는 다정, 온기, 스타일, 자기 성찰의 종합이자 자신과 모두에게 매일매일 단순히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을 선의 평범성이라고 하는데요.


다정(Friendliness)은 마트 직원의 인사에 미소로 응대하는 평범한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과 아량을 말하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어떤 매장을 들어가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직원을 마주할 때 저절로 마음이 말랑해지는 걸 경험합니다.


온기(Warmth)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정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바쁜 와중에도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어린 동생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는 아이, 반복되는 실패로 지친 동료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온기가 담겨 있어요. 이런 온기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순환하며 이타심과 자기애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느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스타일(Style)은 취향과 태도의 조합으로 우연과 운명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각오의 외적·내적 표현으로 정의합니다. “인간성의 스타일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라는 문장에 깊이 공감했는데요. 자기만의 인간성의 중심을 잘 갖춘 사람은 위기나 문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합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의 오류로 우리가 예약한 프로그램이 하염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아까운 시간을 버리며 누구나 화가 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당황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직원들에게 큰소리로 불평하지 않고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애쓰셨다고 한마디 건네는 것, 그것이 바로 스타일입니다.


자기 성찰(Retreat)은 ‘다른 쪽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진실하고 정직한 관심을 기울이고 전환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보는 거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가끔 한 발짝 물러나 내가 달려가고 있는 길의 의미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선행은 무엇인지 등 질문을 던지다 보면 느린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작가의 글을 따라가며 예시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고 됩니다. 더 나아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용기가 일어난답니다. 더불어 양극단으로 갈라져 서로 비난하기 바쁜 세상에 지치고 암울하던 마음에 은은한 희망이 비치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사실 당신은, 아니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란다. 더 많은 빛, 더 많은 인류애, 더 많은 느린 행복, 더 많은 지극히 평범한 친절을 바란다.❞ _『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 82

꼭 같이 고민해보고 싶었던 질문들을 공유하며 글을 갈무리합니다.

❝왜 ‘충분’은 결코 충분하지 않을까?❞

❝무엇이 나를 아름답게 만들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선행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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