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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Oct 03. 2023

내가 받고 싶었던 아빠의 사랑을 신랑에게 바란다


"생각해 보니까 난 가족과 함께 여행했던 기억이 없어요"

"맞아, 우리 거의 그런 것 같지 않아? 더구나 주 6일이었다?"

"어? 그러네! 와 주 6일 근무를 어떻게 하지, 하긴 우리 주 6일 학교 갔다"

"맞아 맞아, 놀토 있고!"


신랑의 친한 선임네 가족과 함께 양평 두물머리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선임네도 외동아들을 키우고 있는지라 남편들처럼 아기들도 형,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다.

두물머리에서 나와 점심 식사를 하러 한 짜장면 집에 들렀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불현듯 든 생각이 가족들끼리 나오니 이렇게나 좋은 것을

왜 우리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이 전무한 걸까? 


친정집에 있는 사진앨범을 들여다보면 전무하다는 건 나의 기억에 전무하다는 것이지 가족끼리 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다. 내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함께 한 가족사진은 없다는 게 흠이다. 


그리고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빠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우리 아빠는 60년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대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 사람임은 분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나시는 분이다. 더구나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군입대 할 때, 군 생활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참 군인이셨고 찐 군인이 되고 싶으셨던 분이다(할아버지의 반대로 말뚝은 못 박으셨다).


아직도 나와 내 동생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이다.

올해 내 생일에도 멋쩍은 웃음이 섞인 말로 "네 동생이 알려줘서 알았다야~" 하셨다.

한두 해 있던 일이 아니라서 서운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는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린 시절 장녀라는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참 많이 맞고 자랐다. 아빠는 많이 엄하셨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딸로서의 관계가 그리고 그 거리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멀고 또 멀었다. 

이제야 비로소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보니 아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가 자라오는 동안의 아빠는 지금도 납득할 수가 없다. 


아빠의 부재를 엄마가 갖은 고생과 노력으로 많이 채워주셨지만 아빠와 엄마는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고 부모가 된 지금은 그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동생이 태어났다. 요즘은 이따금 지나가는 말로써 하시는 말씀이

"참 미안하다, 동생이 태어나고 난 뒤에 네가 너무 커 보여서 스킨십을 전혀 해주지 않았었어"

알고 있다. 아빠의 품에는 애교 많은 동생만이 안겨 있었고 난 그저 아빠가 무서워서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 또한 맞는 말이지 않나 싶다. 


비 또는 눈이 오는 날이면 등하교를 차로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우리 아빠는 내가 학교는 잘 다니는지 친구들은 어떤지 어떤 진로를 희망하는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12살 이후 집엔 아빠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 신랑에게 당부했던 말이 있었다.

많이 놀아달라고, 많이 안아달라고, 스킨십 많이 해달라고, 근교라도 자주 나가자고, 여행 많이 다니자고,

주눅 들게 하지 말라고, 엄하게 다스리려 하지 말라고, 크게 혼내지 말라고, 지지하고 응원해 주자고,

우리는 우리고 아기는 아기이니 소유할 생각은 일절 하지 말자고, 우리를 아기에게 투영하지 말자고. 


내가 원하는 걸 신랑에게 이야기하고 보니 전부 내가 아빠에게 아쉬웠던 부분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아주다가 버럭 화를 낼 때면 우리 아기의 표정에 옛 나의 모습이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많이 쓰리다. 그래서 되려 내가 신랑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데 결국 내가 내 아기한테 나를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깨닫고 있다.


연휴를 맞이해 어제오늘 이틀 동안 근교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외출하기 전부터 일명 기저귀가방을 챙기는 데 집중하더니 나가서는 온통 아기에게 집중하는 아빠,

온몸으로 놀아주기도 하고 자유영혼을 만끽하는 아기의 뒤를 든든히 지켜주기도 하며

아기의, 아기를 위한, 아기에 의한 하루를 있는 힘껏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이다. 


내가 바라는 '아빠의 모습'을 신랑은 자연스레 하고 있다. 가끔은 우리 아빠가 이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가 덜 고생했다면 엄마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면 그랬다면 지금 우리 가족은 온전했을까. 


아빠의 부재에 따른 내 헛헛했던 마음을 신랑에게 솔직하게 말한 적이 있다.

4인 가족의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역시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행복했던 기억이 옅게 그려지는,

아쉬운 게 터무니없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본인 또한 갖고 있다고. 본인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신랑의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아기는 우리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아빠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아들은 아빠가 되었고, 이 아빠 또한 아들이 생겼다. 

다가올 어느 겨울날, 평일에 쉬게 된다면 SNS에서 읽었던 내용처럼 유치원 땡땡이치고 눈썰매장에 데려가 신나게 놀아준 다음에 돈가스 먹고 집으로 돌아올 거라며 까르르 웃던 신랑. 

유치원 땡땡이를 왜 치냐는 나의 물음에 그래야 재밌는 거라며 벌써 신나 하는 신랑을 보고 난 또 우리 아빠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 한편을 대리만족으로 채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는 계셨지만 아빠의 자리에 계시지 않아 그 빈자리가 터무니없이 커 마음 한 구석에 아주 큰 구멍이 나 있던 내가 우리 신랑을 통해 그 구멍을 채워가고 있는 게, 이게 맞는 행동인지 모르겠으나 이렇게라도 신랑을 통해 내가 받고 싶었던 아빠의 사랑을 대신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밤잠 재우러 들어가 한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니 아기가 이내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린 시절 아빠 옆에서 자다가 굴러다니며 아빠를 때렸다고 새벽부터 욕먹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새근새근 잠든 아기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안정되었다. 




딸들은 자신들의 아빠와 비슷한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말이 있다. 미래에 결혼을 한다면 난 곧 죽어도 우리 아빠 같은 사람만은 아니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찐 군인이 되고 싶으셨던 아빠와 현재 군 간부로 복무 중이며 시간 약속에 예민한 신랑이 아빠와 너무 닮다 못해 똑같긴 하지만 여러 면에 있어서 아빠와는 정~말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기에 더 이상 우리 아빠와 같은 모습은 없고 없을 것이며 없길 바란다. 


아빠,

그때 그 시절 아빠는

지금 할 수 없고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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