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 가을호 연재글
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 모였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이 지면을 소개하는 문구는 20대 교사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는 30대이다.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만 나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빠른년생이라 병원에서 처방전을 떼면 만2 9세라고 적혀있다. 빠른년생으로 빠른년생의 사회적 혼란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나는 내 나이를 친구들과 같은 31세라고 말하고 다닌다. 간혹 몇 년생이나 물어보면 '빠른 92'가 아니라 그냥 '91'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요즘 그 91년생, 31세 친구들과 모이면 빠지지 않는 주제가 제테크다.
동아리 친구들과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들과 처음 만난 건 스무 살이었다. 만나면 우리의 주제는 꽤 오랫동안 연애였다. 누군가 맘에 들고 누구와 만나고 또 헤어지고 슬프고 다시 기쁘고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지금도 빠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메인이 되지는 않는다.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지만 지금 먹으면 그 감흥이 덜 한 느낌이랄까. 서로 발령을 받고는 하는 일에 대해서 열심히 씹었다. 누군가 맘에 안 들고 누구와 다투고 또 화해하고 뭐같고 그럼에도 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보니 그렇게 씹어대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피로한 짓이다. 최근에 모임에서는 직장생활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한 사실 정도만 교환한다. 몇 학년이었고 코로나로 학교에서 원격을 어떻게 진행하는지의 간단한 질의응답 같은 것.
다들 운이 좋게도 임용을 한 번에 붙어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결혼이 빠른 편이다. 물론 그럼에도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고 안 하겠다 하는 친구들도 많다. 결혼한 친구들이 다른 직업의 친구들보다는 빠르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하듯 해제하는 것은 한국식 인생표에 한마디 거드는 뉘앙스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희한하게도 그날 모인 친구들은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치솟는 집값과 그로 인해 민감해진 경제 관념과 그에 따라 더 예민해진 제테크에 대한 관심이 다들 엄청났다. 나도 어영부영 20년도 더 넘은 아파트를 사버린 상태라 그랬다.
집을 사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앞으로 집값의 전망과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지만 서로 많이 고민하고 나름 여러 가지 경우를 계산하며 결정했다. 나는 아내를 바깥양반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바깥일 집안일로 나눠서 불렀던 관념을 그대로 반영한 호칭이다. 실제로 집을 사고 현재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모든 바깥일을 아내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제테크에 관심이 큰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시작은 집을 사게 되면서였다. 몇억 씩이나 하는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대출을 받는 것. 우리 둘을 뭘 믿고 이 큰돈을 빌려주나 싶을 정도로 대출이 나왔다. 대학교 2학년, 학생회실에 모여서 선배들이랑 공부했던 자본주의를 몸으로 받았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가지는 자본가와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에서는 돈 자체가 생산수단이 된다. 즉 돈을 많이 유통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큰 자본을 움직일 수 있다. 지독한 세상이다. 역시 자본주의는 맘에 안 든다. 그러던 어느 날 바깥양반이 질문 하나를 해왔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로또 되면 뭐 할래 라는 질문을 들어봤거나 스스로 해봤을 것이다. 최근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에서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세 친구가 로또 같은 일을 겪게 되면서 큰 돈을 가지게 된다. 그리곤 전혀 다른 결정을 한다. (책을 적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까 봐 적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알아주길) 한 사람은 건물을 사고, 한 사람은 창업을 하고, 딱 한 사람만 다니던 회사에 남는다. 그런데 바깥양반이 던진 질문은 로또가 아니라 연금복권이었다. 연금복권은 당첨되면 매달 700만 원씩 들어오게 된다. 아마 회사에 남았던 그 한 사람이 겪은 일이 로또가 아니라 연금복권이라면 그래도 남아 있었을까.
질문은 이랬다.
"매달 천만 원씩 통장에 들어오면 어떻게 살 거야?"
이 질문은 가볍게 보면 그저 즐거운 상상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내 꽤 철학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못했다면 이 글을 이곳에 보내는데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처음 발령을 받을 때 부장님께서 환영회에서 읽을 취임사를 준비시켰다. 얼마나 준비하냐고 물어보니 반쪽 정도 준비하랬다. 취임식 날이 되었다. 같이 발령받은 동기는 두 문장으로 취임사를 마무리하였다. 취임사 준비는 우리 부장님만 시켰던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반쪽분량을 갈비가 구워지는 연기 가득한 자리에서 거창하게 읊었다. 당혹스러운 그 기억 때문인지 그날 이야기한 취임사는 잊히지가 않는다.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싶어요."
취임사의 요지는 이랬다. 교사를 단순히 직업적인 밥벌이를 넘어서 아이들과 같이 배우며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 그때의 바램은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만약 매달 천만 원이 생기는, 밥벌이로써 효용이 흐릿한, 상황에 굳이 밥벌이를 지속할 것인가. 행복한 밥벌이에서 밥벌이가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오롯이 아이들과 같이 배우며 함께하는 기쁨을 즐길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들은 다음 날 괜히 아이들에게 힘차게 아침 인사를 전했다. 전해질지 모르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담긴, 관심을 담아 화면 너머로 전했다. 그날은 네 시간 연속된 줌 수업이었는데도 즐거웠다. 아이들도 웃으며 인사를 해줬다. 그 순간은 조금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수단으로써 밥벌이를 없애니 목적이 뚜렷해졌다. 수단과 목적하니 칸트가 생각난다. 칸트는 행복해지려면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 첫 번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정언명령 두 번째,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달 천만 원은 조금 더 본질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어릴 때처럼 꿈꿔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매달 천만 원은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이뤄질 수가 없다. 그리고 돈은 그 자체가 수단이지만 꽤 자주 돈이 우리를 수단으로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덴마크 벽돌공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당당히 자신의 직업을 은행장과 비교하며 직업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드러냈다. 내가 하는 일을 선택하는 데 돈은 큰 고려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금복권 정도는 당첨되어야 할 수 있는 본질적인 고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많은 부러움이 남았다.
10년 전 학생회실에 모여 자본론을 읽었을 때와 지금의 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결이 조금 다르다. 물론 바라는 사회적인 지향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작게라도 주식을 사고 어디 괜찮게 투자할 만한 곳이 있을까 궁금해한다. 이건 대부분 2030세대들이 가지는 고민이다. 어떤 선배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의식화가 아직 덜 된 친구'라는 듯 쳐다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날 그 모임에서 친구들도 그렇고 젊은 세대는 이대로 있다가는 부모 세대의 자산을 쉬이 갖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이다. 부자를 꿈꾸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지만 정작 내가 바라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지켜내는 것들보다는 사회 자체가 변하는 것을 더 바란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꼈던 이상한 마음은 기특함과 짠함 그리고 짙은 아쉬움이었다. 모두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과 예전처럼 무용한 것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아마도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를 지나는 모든 친구를 응원한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