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의 선포

by 전용식

3-1 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의 선포


원구대제에 앞서 고종은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습니다.


“오직 상제가 날마다 여기를 내려 보고 있으니 마땅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털끝만큼이라도 정성스럽지 못한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제가 내려와 그대를 보고 있으니, 그대는 딴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람들은 다만 하늘이 아득히 멀고 귀신이 은미 하다는 것만 알 뿐이지 구석구석 훤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정성이 있으면 감응이 있고 정성이 없으며 감응이 없으니,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 받들기를, 마치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듯이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옛날의 성스럽고 밝은 제왕들은 하늘을 공경한 까닭으로 그 내용이 문헌에 상세히 실려 있다. 하늘과 사람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니, 성인은 바로 말을 하는 하늘이며 성인의 말은 곧 하늘의 말이다. 공경은 한결같은 것을 위주로 하며 한결같으면 정성스럽고 정성스러우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 지금 대사를 당하여 백관과 집사들은 각자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4년 10월 9일)


이상의 기록을 보면 고종황제는 하늘을 감동하게 하도록 의관을 정대하고 정성을 다해 제를 올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상제는 유교가 태동하기 전부터 하느님을 이르는 말이었기에 고종황제가 원구제를 올리며 고했던 상제님은 다름 아닌 하늘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전 시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고종은 황제즉위를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아관파천으로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난 고종은 황제즉위에 필요한 상황을 조성해 나갔습니다.


다른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입니다.

정유(1897)년 음력 9월 17일(계묘), 임금이 황제에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고쳐 대한이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이래로 정부에서 임금의 뜻을 헤아려 칭제 할 것을 권하였는데, 아국(러시아), 법국(프랑스), 미국의 공사들이 한결같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일본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 또한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삼포오루가 죄를 짓고 떠나자 조정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의전의 절차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각국 공사들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고 나왔다. 아국 공사는 “귀국이 굳이 참칭 하고자 한다면 우리 아국은 외교관계를 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두려워했으나 거의 일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저지당하는 것은 매우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에 신료들에게 넌지시 뜻을 내려 연이어서 주청 하도록 하여, 마치 임금이 뜻을 굽혀 중론을 따르는 것같이 하려고 하였다. 이에 기로대신 김재현 등이 연명해서 소를 올리고 의정 심순택과 특진관 조병세가 따라서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하였다. (『매천야록』, 황현)


심순택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하여 황제로 칭제 할 것을 고하고, 고하고, 아뢰어 마침내 교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종이 “말이 옳지 못하다”라고 겉으로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은근슬쩍 속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정해진 순서로 흘러갑니다. 황제 등극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너희들이 원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유생 수백 명의 연명 상소문이 올라오고, 10월 2일에는 조정 중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황제즉위를 간청합니다. 이렇게 고정은 풍전등화 같은 망국의 갈림길에서 일제와 주변 강대국의 협박과 만류를 뿌리치고, ‘황제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환구단 등 각종 의례는 천자국의 위엄에 맞게 바뀌었습니다. 남단에서 제사를 지내오던 풍, 운, 뢰, 우의 신을 환구단으로 옮겨오고, 사직단에 모시던 국사, 국직의 신위를 태사, 태직으로 높여 받들게 되었으며, 황제즉위 시 행차한 경운궁 즉조당의 편액은 태극 전으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뀌었으며,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전국의 죄인들에 대해 대사령을 내렸습니다.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11월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고 이후 정부에서는 국가와 황제의 어기, 친왕기, 군기 등을 제정했으며,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러시아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당시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를 두고 ‘조용한 변화’라 하였습니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는 침략자의 발자국 소리나 반역자의 함성, 산을 울리는 포성, 침략자들의 요란한 횃불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용히 일어난 의미심장하고도 기대에 부푼 변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고종의 황제 즉위식은 자주독립국으로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환구단에서 진행된 고종의 황제 즉위식은 비록 자주독립국을 표방하였지만, 오히려 중국적 전통으로 회귀한 모습으로 비칠 뿐이었으니까요. 이 자리에 참석했던 독일 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그들의 비아냥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황제 칭호를 수용한다는 의사를 밝히기 위해 이달 12일 새벽 3시 예전 청나라 공사관 숙소였던 자리에 세워진 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방식에 따라 예를 올렸습니다. 그는 명나라 황제의 옷을 모방해 노란색 옷을 입었고, 황태자는 왕이 전에 입었던 것과 같은 붉은색 옷을 입었습니다’


일본 측 기록은 어떤가요.

쓸데없이 부화허식의 망상에 젖어서 오랫동안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은 그 나라를 위하여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렇듯 고종황제의 즉위식이나 대한제국의 선포에 서울에 주재하였던 공관들의 평가는 일치합니다. 중국 황제의 모방과 허례허식. 다시 말해 속이 비어있는 껍데기 황제라는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종의 처지에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헤집고 나올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갑오개혁으로 상실됐다 회복된 권력을 제도적으로 굳건하게 다지는 것. 그것이 대한제국의 선포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킬 것은 왕권 강화 뿐이었으니까요. 이제 고종은 권력과 군사력, 경제력을 완벽하게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 것입니다.


다음 화, 3-2.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야 내가 산다. 무능과 무지 사이에서 고종(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춥고 배고프고, 어지러운 조선), 4. 1인 독재의 무서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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