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의 선포

이미지 : 원구단(환구단)

by 전용식

3. 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의 선포


"짐은 만백성의 뜻에 따라 대한 제국 황제의 보위에 올랐음을 내외에 선포하노라."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대한'이란 말을 처음 쓴 이는 고종 황제입니다. 이 과정은 1897년 10월 1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개국 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으니 지금 천하의 호칭을 대한으로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


본래 삼한이었으므로 그 '한'을 되살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고, 고종 황제는 원구단에서 하늘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의 출범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한은 고조선 시대의 삼한을 뜻합니다. 고종이 삼한을 들먹이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은 조선이 옛 조선의 삼한을 계승한 천자국이자 자주독립국으로 재탄생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과연 조선이 천자국이며 자주독립국인가요. 이것은 의지의 표명이었고, 개혁군주의 강대한 모습이라고 고종 옹호론자들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고종을 압박해서 연출된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당시의 상황 살펴보겠습니다.

1896년(고종 33년) 고종은 친러세력과 내통한 결과 12월 28일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깁니다. 이것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곧 친러 정부의 집정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고종의 야비함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본인의 왕권강화와 권력야심 그리고 조선왕실의 안위를 지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몽고의 지배 아래 있던 러시아는 당시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으로 발전해 갔으며, 로마노프 왕조의 제5대 황제인 표트로 대제 때에 이르러 러시아의 근대화가 이루었습니다. 한마디로 고종은 조선을 침탈하려는 외세의 세력 중에 유일하게 왕조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러시아임으로, 나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의중이었던 것입니다.


국제 정세를 모르는 고종은 이렇게 국왕으로서의 힘과 위신을 러시아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러시아는 곧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보를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러시아의 폭정으로 인해 조선의 위신은 급추락하였고, 국가권력의 침해가 심해지면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져 갔습니다.


결국 고종은 환궁을 결심합니다. 그렇지만 고종의 환궁은 뜻밖에도 경운궁이었습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악몽이 떠올랐는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보면, 8월에 경복궁에 모시고 있던 명성황후의 혼백과 유골 그리고 어진도 경운궁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8개월 후인 10월 12일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고종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원구단을 짓고 원대제의 절차와 예법을 정하도록 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신들에게 국호 개정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황제로 즉위하는 역사적인 상황에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는데요, 옛날 고려 태조가 천명을 받아 삼한三韓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했던 것처럼, 새로 천명을 받아 황제에 오르는 그 시점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일제와 강대국들의 이전투구에서 조선은 성리학을 통한 예를 찾았습니다. 고종황제가 대한의 나라 세움을 상제님께 고하는 천제를 올렸던 원구단과 원구대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종이 우리나라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원구대제’입니다. 황제는 원구단에서 즉위하고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제님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단은 천 원 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를 드리는 단은 네모나게 쌓았습니다. 원구단은 이름 그대로 둥근언덕같이 쌓은 단으로, 원단이라고도 합니다.

천자는 천제를 올린 후 비로소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광무光武 1년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원년의 뜻입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우주관, 세계관을 가지고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이 되었다고 만천하에 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위정척사파들에게는 혁명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후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자 칭호가 계승됐지만, 거듭된 침략을 받으면서 차츰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전락해갔고 결국 1464년 세조 10년 원구제를 중단케 했습니다. 이후 실록에서 원구제를 올렸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국왕이 천제를 올리려 할 때마다 신하들이 제후국으로 천제를 올릴 수 없다며 반대하는 기록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丁亥 命停明年正月圜丘祭

임금이 명하여 내년 정월의 원구제(園丘祭)를 정지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4권 10년)


郊祭, 禮之大者也 惟天子得以行之, 故魯之郊禘, 孔子非之, 聖人之訓, 至嚴且切

今此親祀南郊, 旣非諸侯之禮, 圓壇將築, 吉日已涓, 臣等於此, 不能無惑焉


교제(郊祭)는 예 가운데에서도 큰 것입니다. 오직 천자라야 행할 수가 있으므로 노(魯)나라의 교체(郊禘)를 공자가 비난하였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이번에 남교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는 것은 이미 제후가 행할 수 있는 예가 아닌데, 원구단을 쌓으려 하고 날을 이미 잡았으니 신들은 이에 의혹스러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106권 8년)


이렇듯 옆 나라의 눈치나 보면서 철저하게 사대주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위정자들. 독자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진취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군신들의 모습에서 망국의 아픔과 설움을 당한 조선인의 고통이 전해집니다.

3-1 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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