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조선중화주의

by 전용식

이미지 설명 : 천하도(天下圖),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하게 된 지도로서 중화사상과 상상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세계지도이다.


망국의 조선중화주의


조선중화주의는 한마디로 조그만 변방의 소국에서 벗어나자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다시 말해 18세기 조선의 문화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만들어낸 것인데 비판론자들은 이유가 어떻든 명나라에 대한 사대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애초에 중화를 구성하는 것은 중원의 지역과, 한족으로 대표하는 종족, 문화 즉 성리학인데 이 세 가지에서 조선은 단 한 가지인 성리학적 요소만 분리해서 강조하므로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상의 이론이라고 합니다.


청이 중국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이나 종족은 과감히 내던지고, 중화문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곧 문화 중심의 화이론이 되었고 조선을 중화국가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종래의 국제관계를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조명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 소중화로 여겨지던 조선이 그렇지 못한 한낱 오랑캐인 만주족, 이적의 나라인 청에게 굴복하여 군신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은 곧 수치심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새로운 천하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한편 스스로 정체성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의 깊은 곳에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줘 국난을 극복하게 해 준 명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선은 여진족에 대해 조선이 우월하다는 조선 초기의 소중화주의를 조선중화주의로 바꾸고, 표방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유학자 혹은 지식인들이 가졌던 모든 자부심의 본질은 중화에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하는 자존심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중화와 연결을 지음으로써 생긴 자부심입니다.


대표적으로 1705년 창덕궁에 명 태조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설치한 것이나, 충북 괴산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는 만동묘를 세운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임진왜란으로 굳어진 숭명 사상과 조선 백성의 항쟁 의식으로 고조된 반청 감정은 연호 문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명의 숭정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 연호를 쓰고 있지만 개인 문서나 재향 축사에는 여전히 명의 숭정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계승자로서 이제 중화의 유풍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 뿐이라는 자부심. 구체적인 사례를 살려보면 신유한(申維螒)이 “우리 또한 중국인”이라고 선언하며 “우리만이 은나라의 정삭(正朔)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자부한 것이나, 윤봉구(尹鳳九)가 “세상에 오랑캐 냄새가 가득한데 우리만이 소화(小華)”라고 자부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소산이었습니다.


고구려사를 강조하여 실학자로 알려진 「동사(東史)」의 저자 이종휘(李種徽)가 스스로를 은나라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동주직방지(東周職方志)」나, 「소중화광여기(小中華廣與記)」로 불러도 될 것이라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춘추시대 주나라와 노나라의 관계에 비유한 것도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됐습니다.


특히 한원진(韓元震)은 “세상이 오랑캐 천하가 된 지 100년 동안 동쪽 한구석에 치우친 나라만이 홀로 문명, 즉 중화의 다스림을 보존하여 성현의 계통을 잇고 있다”라고 논하면서 “조선이 중국에 나아가 천하를 소유해도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 또한 그렇습니다.


일각에서는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이항로(李恒老)의 벽이론(闢異論)을 통해 조선중화주의가 구체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뿌리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문화적 화이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노자, 공자, 맹자, 순자와 같이 자(子)를 붙인 조선의 대 유학자 송시열을 두고 정조는 송자를 빼놓고는 조선의 정치와 철학사상을 논할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저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통해 조선중화주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중원 사람들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東夷’라고 부른다. 그 호칭이 아름답지 못하나, 중요한 것은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동쪽 오랑캐요 문왕文王은 서쪽 오랑캐이다.’라고 하였으나 그들 모두 성인·현인이 되었으니, 우리라고 공자와 맹자가 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다. 옛날 중국 복건福建 지역은 남쪽 오랑캐의 소굴이었지만 주자가 그곳에서 태어난 뒤로 중화의 예악 문물이 번성했던 지역들이 도리어 그곳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 오랑캐의 땅이 오늘날 중화가 되는 것은 오직 변화시키기에 달려있을 뿐이다. (「宋子大全」 권 131, 「雜錄」)


안타깝도다! 그처럼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갑신년(1644년) 3월의 멸망을 맞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은 까닭에 잡초가 쉽게 우거지고 뱀과 지네가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는 순舜·우禹 임금이 돌아보던 땅과 공자·주자가 가르침을 전하던 지역이 모두 옛날과 달라져 오랑캐의 비린내만 가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은하수를 끌어다 깨끗이 씻어낼 수 있으리. 오직 우리나라만이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홀로 예를 간직한 나라가 되었으니, 주나라 예법이 노나라에 있다고 할 만하다. 공자께서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뗏목을 타고 동쪽 우리나라로 올 것이다.(「宋子大全」 권 138, 「皇輿考實序」)


유학자들의 스승 송시열의 이러한 인식과 가르침이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이 유교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유일한 집단임을 자부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조선이 예로 상징되는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조선의 유학자와 유생들이 조선중화주의를 내세우며 망해버린 명나라를 추앙하는 사이, 일본에서는 유교와 결합된 스이카신도(垂加神道)를 제창하였던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로 재해석되며 황도유학(皇道儒學)으로 전화되어 갔습니다. 독자적 문화 연원 속에서 새로운 중화를 창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황도유학은 일제강점기 문화통치 시절 조선인에게 창씨개명과 일본 천황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라는 논리로 이어졌고, 곧 황도불교(皇道佛敎)로 이어졌습니다. 승려들에게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고 유교로 조상을 부정하고, 불교로 살생을 일삼는 해괴한 논리가 학문의 이름으로 조선인의 정신세계에 식민주의를 주입하였습니다.

다음 장은 ‘고종황제와 원구단, 대한제국’의 선포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좌초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