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상황과 배경’
상단 이미지 : 1913년 서울 광화문 앞 육조거리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부 좌초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선포‘_시대적 상황, 배경’
1. 개화와 수구, 위정척사론은 망국의 시초
망국은 개화와 수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출발점은 개화와 수구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개화(開化)는 사람의 지혜가 열려, 폐쇄적 사상이나 낡은 문물이 새롭게 진보한다는 말이고, 수구(守舊)는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른다는 말일 터.
19세기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서세동점(西勢東漸).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의 압박 속에서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개화를 강요받았습니다.
“개화는 좋은 것이여”
“수구는 낡은 사고방식이여, 나쁜 것이야.”
개화는 좋은 것, 수구는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개인의 사고를 규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100년여 전 우리 선조들은 과연 개화란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려 수구를 논하였는지 말입니다. 조선 고종 대에 활동한 학자인 온건개화파 지식인 김윤식의 개화설을 보겠습니다.
“나는 일찍이 개화지설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무릇 개화란 변방의 미개 종족이 구주의 풍속을 듣고 자신들의 거친 풍속을 고쳐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동토는 문명의 땅이니 어찌 다시 개화하겠는가?”
이처럼 그는 우리나라는 문명국이므로 개화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개화라는 것은 변방의 미개 종족이 다른 나라의 풍속을 듣고 자신들의 거친 풍속을 고쳐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문명의 꽃을 피운 우리나라는 필요 없다고 역설합니다.
당시의 성리학자 혹은 사대주의에 빠진 기득권 세력의 공통된 마음. 바로 위정척사입니다. 정학을 지키고 이단인 사학을 배척하는 유교의 이념을 나타내는 사상인데, 정확하게는 척사위정(斥邪衛正) 또는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정학인 성리학과 정도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 배격하자(척사)라는 것입니다. 곧 위정척사는 전통 사회의 체제를 고수하자는 유교적 사상을 나타냅니다.
당시 일본에 의하여 대두된 개화론은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이간시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결국 개화란 일본의 조선 무력화. 조선 땅 입성을 당연시하는 단어임에도 기술문명의 우위성 때문에 개화론은 100여 년 넘게 갑론을박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개화 노선에 반대하던 부류는 무조건 수구로 분류되고, 기득권에 눈먼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매도당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기득권 세력의 유지인가. 왕조 체제의 구축인가. 물론 일부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의 대두 이항로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이항로는 양국의 목적이 교역에 있음을 지적하고 자급자족 체제인 조선의 농산품과 서양의 공산품을 거래할 때 발생하게 될 무역적자 혹은 거래물품이 양국이 차이가나서 결국에는 균형을 잃어 경제 파탄이 이뤄질 것이라 우려를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흡사 지금의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것만큼 예리한 지적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구한말 대다수의 유생과 학자들이 그의 주장, 다시 말해 위정척사론에 동조한 것은 아닙니다. 위정척사에 반대하는 개화파는
위정이 정학을 보위한다는 논리일진대, 바로 그 정학이란 유학이고 유학은 조선 고유사상도 아니고 중국에서 빌려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유생들이 그것을 옹호하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중국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상을 흡사 조선의 고유사상인 것처럼 따르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위정척사론의 이론서라 일컬어지는 존화록(尊華錄)이라는 유학서의 해석이 완료되면서, 그들이 진정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존화록은 1900년에 유학자 송병직(宋秉稷)이 성균관의 모든 사실과 존화양이(尊華攘夷)에 관한 글을 모아 엮은 유학서입니다. 존화양이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존화양이尊華攘夷 - 명사/역사,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선의 국제 관계에 대한 기본 정책을 이르던 말. 건국 초기에는 배원친명(排元親明), 17세기에는 존명배청(尊明排淸) 따위의 정책을 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존화록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6권 3책. 목활자본.이 책의 집필 동기는 최익현(崔益鉉)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당시 국내 상황을 이적(夷狄)의 풍속이 난무하여 들어오고 이단음사(異端淫邪)의 설이 횡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 대책을 유림에게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저자는 그 구체적인 대안을 존화양이와 척사위정에서 찾고 있다.
이 책은 성균관 및 관학교육기관의 실상을 알려 주며, 또한 격동기 구한말의 의병 상황과 화서학파(華西學派) 계열의 척사위정의 이론을 알려 주는 기본 자료의 하나로, 유학사 및 사상사적 가치가 크다.
그렇습니다.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의 압박 속에서 구한말 조선의 유학자들은 쓰러져가던 대국 청나라만을 우러러보며, 개화와 수구 사이에서 논쟁만 일삼던 어두운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17세기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국제상황에서 조선만이 인륜을 중요시하는 중화문화의 이념을 지키는 전통 계승자라는 논리. 결국 구한말 유학자들의 시대정신은 조선중화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쇄국의 빗장을 더욱 견고히 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