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그렇다면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안동 김 씨를 누르고 친정 풍양 조 씨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자성(신정왕후), 즉 조대비의 이 전교로 흥선군이 처음으로 살아 있는 임금의 아버지로 등장하게 됩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나 인조의 아버지 능양대원군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사후에 추존되었으니,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있는 대원군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1863년 즉위 당시 고종은 열두 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조 씨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 했고, 대왕대비 조 씨가 섭정을 양보함으로써 드디어 몰락 왕족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돌려, 흥선대원군이 정국의 전면에 나서던 그때. 그때는 19세기 동북아시아 무역 전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입니다. 1839년부터 1860년까지 청나라는 영국과의 1차, 2차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영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과 상하이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조선 해안에는 이양선이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 다시 말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내세웁니다.
한편 순조가 즉위한 뒤 철종까지의 60년은 참으로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거머쥔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족속들은 관직을 사고팔며 과거제도를 어지럽게 하였고, 부패한 지배층은 국가재정의 뿌리인 삼정을 어지럽게 해 백성들은 더욱 나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양전을 공정하게 시행하지 않아 전정이 문란해져 일반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커졌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목적이었던 환곡이 관청 고리대로 변질하는 등 일반백성들은 출구가 없는 하루하루를 모질게 견디던 그때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항쟁에 나서게 됩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이어져 1862년 임술민란은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제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삼정의 문란을 고치려고 하였지만 성난 민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정국의 전면에 나타난 것입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알고 있고, 세도 정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세도 가문의 핵심 권력기관인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으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을 모법으로 하는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군사와 법체계를 정비했습니다. 또한 농민을 수탈했던 지방 토호 세력과 서원의 폐단을 척결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의 신종을 추모하려고 세운 만동묘가 있던 화양서원을 없앤 후로 전국에 사액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600여 개의 서원을 없앴습니다.
전정을 바로잡기 위해 양전 사업을 벌여 실제로 경작하고 있으면서 토지 대상에서 빠진 토지를 색출하는 은결 실시와 군정은 호포제를 시행하여 평민에게만 거두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부과했습니다. 환곡은 사창제를 시행하여 빈민 구호에 힘썼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대원군은 농민들을 생각하는 참된 집권자. 아니 어쩌면 조선의 혁명가라고 칭송할만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반발을 크게 산 패착이 있습니다. 바로 경복궁 중건입니다.
알려진 대로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에 완전히 불타 버렸는데, 원인은 방화입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가 피란을 떠나자 분노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는 기록을 볼 때 백성들을 두고 떠난 왕을 원망하는 마음의 표출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후 300여 년 동안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채 버려둔 것인데, 아니죠. 버려두었다기보다는 복구하는데 소요되는 인력이나 물자가 너무 많이 들어 역대 왕들은 엄두를 못 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기존의 경복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건설해야 한다는 욕심이 화를 부릅니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는 각 건물의 가로길이를 다 합해서 390칸(약 955m) 규모였고, 이후 조금씩 증축돼 임진왜란 직전까지 5,000칸(약 1만 2250m) 정도였는데, 이번 중건에는 7,225칸(약 1만 7700m)으로 처음의 18배가 넘는 토목공사를 진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나라의 재정이 튼튼하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공사 시작 3년 전에 전국 농민들이 지방 관청의 무거운 세금 징수에 반발한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조선의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억지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중건 예산은 약 750만 냥인데, 지금 돈으로 5,000억 원대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당시 총 유통 화폐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