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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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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스케치북 Apr 16. 2019

어떤 우정



나 어렸을 적에 남자아이들은 그랬다. 좀 빳빳하다 싶은 종이는 얼른 집어다가 사각형 딱지를 접었다. 웬만해선 잘 안 넘어가는 딱지 하나 가진 놈이 얄팍한 딱지를 다 따버렸다. 또, 동그란 종이에 별이 그려진 딱지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딱지를 보여주고 별이 많으면 별이 적은 딱지를  다 가져갔다.      

구슬치기를 잘하는 아이들은 벌어들인 구슬로 바지 주머니가 묵직하니 축 쳐진 채 다니곤 했다. 그러다 친구가 놀이할 재산이 떨어지면 구슬도 한 움큼 나누어 주고  딱지도 뚝 떼어 주고 그랬다. 그 아이들이 조금 크면 몰래 빨간 책을 돌려보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우정을 과시했다. 남자아이들은 딱지나 구슬이나 빨간책으로 우정을 나누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어느 저녁이다. 숯불에 갈매기살을 지글지글 익히고 있었는데 옆 자리와의 거리가 유난히 가까웠다. 옆 테이블에는 두 명의 중년 남자가 역시나 지글지글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억양으로 보니 속이 짜르르하고 알콜이 온몸을 감도는 타이밍인 모양이다.     

절대 엿들을 생각이 없었는데 자리도 가까운 데다  내용이 슬금슬금 나의 관음증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돼 버렸다. 그들은 어릴 적 친구이고 오랜만에 만난 거 같았다. 그중 한 명은 곱슬머리고 대학을 가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고졸로 사는 남자이다.  

   

그전까지는 옆자리의 소음일 뿐이었는데 여기서부터 내 귀가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학력이 사회의 벽에 부딪혀 힘들다고 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걸 아는데 자신이 없고 자꾸 위축된다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특히 와이프가 무시해서 힘들어하는 듯했다. 부부 싸움할 때는 학력 이야기가 나올까 봐 일부러 지고 만다는 솔직함에 나는 그의 편이 되고 있었다.     

맞은편 그의 친구 뿔테 안경은 아마도 명문대를 나온 듯했다. 그는 위축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곱슬머리는 '너는 와이프보다 학력이 높으니까 내가 얼마나 자존심 상한지 모르는 거야."라며 섭섭해 했다. 친구는 그의 생각을 바꾸어주려 했지만 그는 친구의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시 조용했던  뿔테안경이 입을 열었다.

'나 이혼한 거는 알고 있니?'

'그래. 언젠가 들었다.' 그는  다 알고 있어서 굳이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다.

'왜 이혼했는지는 모르지?'

'모르지'

'그래. 대부분 모른다.' 내 귀가 슬금슬금 더 바짝 옆으로 갔다.

'와이프가 내 사무실 후배 놈하고 바람이 낫더라.' 곱슬머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둘이 좋아 한다더라 ' 그는 또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둘이 살라고 집 하나 해 줬다.'

'뭐? 진짜루?  왜 그랬는데?' 그제야 그가 다그쳐 묻는다.

'나도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좀 잘난 놈으로 보일 거 같더라.' 나는 술잔을 들고

그 테이블로 가고 싶었다. 그건 대체  무슨 심리냐고 묻고 싶었다. 그의 감정은 사치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이번에는 곱슬머리가 친구를 위로하는 듯했다. 식사를 끝낸 나는 힐끔 그들을 보면서 식당을 나왔다. 집으로 오면서  그들 생각을 했다. 두 친구는 그 후로도 몇 병의 이슬이를 축냈을 테고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무게로 서로를 위로했을 거다.  

     

우리는 내 상처가 우주만 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다 가끔 나보다 남의 상처가 크다는 걸 확인하면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뿔테안경은 몇 년 동안 침묵했던 상처를 드러냈다. 그는 높이 올라가 있는 시소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시소의 한 칸 앞으로 가서 평행을 맞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날 어릴 적에는 딱지놀이를 했을  두 친구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더 이상 딱지나 구슬이 필요하지 않은 남자의 우정은 무게중심을 맞추는데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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