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401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비 스케치북 Oct 31. 2019

울 아버지

좋은 이별


아버지와 이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게 좋은 이별인지.. 나는 정말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가족 불화의 불씨가 됐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인 우리 자매들은 친정아버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아버지의 안전과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요양원을 선택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서 아버지를 많이 힘들게 했다. 빌어먹을 1등급을 받지 못하면 요양원 한 달 입원비가 120만 원이라고 해서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연기를 시켰다. 두고두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한 이 짓 때문에 나는 마음에 돌을 안고 살 거 같다. 

잠시 기억을 못 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치매 초기였는데 한 달 정도만에 아버지의 증세는 예상하지 못할 만큼  빨리 진행되었고 요양원 생활 열흘만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렇게 요양원은 싫다고 하시더니... 정말 싫으셨나 보다. 요양원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곳이었다. 딸래미 시험만 끝나면 자주 가서 놀고 외출도 자주 시켜드리려 했는데 아무 기회도 주지 않고 가버리셨다. 나는 나름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집 바로 앞에 병원을 구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이기셨다.


이럴 걸 그랬어...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온통 후회뿐이다. 몇 주의 시간이 흘렀는데, 가족들은 실감이 잘 안 난다고 하는데 나는 절절이 실감이 난다. 전화를 걸면 받으실 거 같고 '그래 알았어. 여섯 시까지 오라고?'라고 하실 거 같다.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잘 가시라는 인사도 못했다... 내일 병원에 가면 또 만날 줄 알았다. 

간병인 말로는 그 날 아버지가 창문을 보며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냥 서로 웃다가 보냈으면... 효도 많이 하고 즐거운 기억이 많았으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 나는  잘 못했다.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며 아버지 생각이 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겁다.   

일본 영화 중에 '굿'바이'라는 영화가 있다. 납관사의 이야기인데 제목의 뜻은 좋은 이별... Good & Bye라는 의미이다. 아버지와 나는 좋은 이별을 하지 못한 거 같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고  인터넷 세상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티비를 보면서도 아버지 났다. 별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람들은 왜 웃고 떠드는지 왜 잘 먹고 잘 노는지 모두 미웠다.

숨 쉬는 것도 슬프고 날씨도 슬펐다. 나는 좋은 이별 법을 몰랐다. '슬픈 마음이 너무 오래 남아 이미 떠나신 아버지의 발길에 무게가 더해지지 않도록 죄책감의 슬픔이 아니라 고마움과 그리움으로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지인은 그런 문자를 보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나를 본 듯이 이야기하는 걸까... 이 문자를 받은 날부터 어쩜 그 사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좋은 세상으로 가시다가 이런 나를 보면서 자꾸 뒤돌아 보실 것만 같다. 

나는 열심인 종교는 없다. 절에 가면 불경 소리가 좋아 촛불을 사고 소원을 빈다. 성당에서는 맨 뒤에 앉아서 미사를 모시기도 하고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따라 부른다. 이번에 어느 종교든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이별에 담담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처럼 요란스럽지도 않고 미련을 잡으려 발악하지 않는 거 같다.

다음 생을 믿기 때문이다. 목사님과 입관 전 예배를 볼 때 찬송가의 가사는 이랬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 내내 나는 많이 울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고인은 더 좋은 다음 생의 문을 밀고 들어갔으며 그곳에 편히 계실 것이고  그동안 이승의 생을 마친 우리가 그곳에 가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영화 굿'바이도 같은 맥락이다. 

 며칠 전에 남편 친구의 장모님 문상을 다녀왔다. 아버지 장례식에 왔던 친구이고 그날 오셨던 다른 분들께 인사도 할 겸 갔다. 전에는 상주와 인사하러 간 거 같은데 이번에는 고인의 사진을 찬찬히 보고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나도 이제야 어른이 되어 가는 모양이다. 상갓집은 언뜻 잔칫집 같기도 하다. 잘 가시라고 모두 모여서 인사를 한다.

불과 2주 전에 우리 아버지 배웅길에 왔던 친구들은 이번에는 다른 친구 장모님 문상을 위해 모여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이 그럴 때'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친구들 결혼식 다니기 바빴는데 지금은 부모님 문상을 다니기 바쁘고 지금부터는 자녀들 혼사에 다닐 것이고 또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하나 둘 내 친구의 부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늙은이는 상갓집 가는 거 아니라고 돌아서서 혼자 눈시울을 적실 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처럼. 정말 인생은 품앗이인 모양이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멜로디는 슬프지 않다. 아니 제법 경쾌하기까지 하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널다가도 이 노래를 부른다. 가끔 또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냥 콧노래처럼 흥얼거릴 때도 있다. '새록새록 보고픈 날들이 또 많이 찾아옵니다.  잘 보내드리고 아프고 그리울 땐 그리워하며 기억하세요.'  그 사람은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린 기억이 있어서 안 보고도  나를 아는 거였다.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같은 통증이 있나 보다.    







보통은  노인을 그릴 때, 실물보다 주름을 깊게 파서 그린다.

더 드라마틱하고 강한 효과를 위해서다. 

검버섯을 진하게  그리거나 흰머리를 강조해서 세월의 때를 덧입힌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일 때는 다르다.

.

.

아 버 지 는..

이세상누구에게나조금씩의아픔이고얼만큼의그리움빚쟁이같은죄책감과놓아버릴수없는짐이기도한존재가아닌가싶다.젊은시절이후로실패라는단어와가장가까웠던울아부지.. 


나는

사진 중 가장 포스 있는 것을 골라 주름은 엷게, 검버섯은 생략, 늘어진 살은 탄력 있게.

연필 쥐고 있는 사람으로의  특권을 맘껏 행사했다. 

 음..

나름 깐깐하고

몇 년쯤은 젊어 보인다..

.

기분이.. 좋다.   





아버지 보낸 지 벌써 7년. 음력으로 10월 04일에 가신 아버지는 천사가 되셨겠지.

납골당에 다녀와서 이별 다음 해에 썼던 글과 영정사진 대신 사용했던 그림을 올려본다.

아직도 아버지 생각날 땐 목이 아프다. 

아부지.. 미안해.


매거진의 이전글 나와 그녀와 그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