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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Apr 20. 2020

대기업 법무팀장이 화물 트럭 기사가 된 이유

몸(손)으로 하는 일의 즐거움

이전에 이커머스 회사에서 도서 MD로 일하면서 하루 종일 매출 프로그램과 데이터, 회원 및 상품 프로그램 데이터, 판매가 이루어지는 마켓 홈페이지, 고객들에게 내보내는 이메일과 문자 등을 들여다보고, 연간/분기별/월별/주간별/일별 매출 예상을 추출해내며 그에 대한 계획과 실행방안을 짜는 일은 하나하나 머리로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서야 키보드에 두 손 곱게 올리고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진행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지끈하게 머리 써서 일은 해도 도서 시장과 고객의 마음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질 않아서 늘 매출 목표치와의 간극과 윗상사들을 타고 내려오는 압박은 컸다. 그럴 때엔 그저 머리를 쓰는 것으론 부족했다. "머리를 짜내고", "머리를 더 빡세게 굴려보는" 그런 굴레 속에서 머리는 늘 지끈거렸다. 혼자의 머리만으로 안 될 때에는 회의실에 모여 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짜내는' 머리 모으기 협공도 했다. 딱히 타고난 재능이나 배운 기술 없는 문과생 출신의 직장인들이 다 그럴 것이었다. 


매출 압박을 받으면서 남은 영업일은 며칠 없는데 계획을 내놓으라고 위로부터의 쪼임을 받을 때는 이렇게 굴릴 대로 굴린 머리를 더 굴려봤자 답도 안 나올 것 같으니 차라리 테헤란로 길가에 나가 매대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으며 도서를 팔고 싶었다. 그건 나름 머리 말고 몸을 움직여 일을 해보고 싶은 나의 진심이었다. 나의 그 말을 들은 팀장님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며 그것을 실행에 옮긴 직장인 선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팀장 이상급 사모임에서, 전 법무팀장님이 화물 트럭을 끌고 나타나셨다는 거였다.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법무팀장님이 더 좋은 기업으로 이직하셨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팀장님은 퇴사 이후 화물 트럭을 사 화물 트럭을 모는 기사가 되었고 너무 좋다고 하셨단다. 모임에 급히 오면서 큰 화물 트럭을 주차할 곳이 만만치 않아 약속 장소 주위를 돌다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면서도 그 양반이 너무 행복해하더라는 것. 대기업 법무팀장이 하는 일이란, 자세히는 몰라도 머리를 쓰는 일 중에서도 단연 탑 아니었을까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평생 머리 너무 써서, 머리 대신 몸을 쓰고 싶었다."라고 하셨단다. 




"머리 좀 그만 쓰고 싶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는 정말로 지끈거리는지 느낌이 그러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 어느 날은 뒤통수가, 어느 날은 옆통수가 화끈거리는 때엔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이 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부하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목숨을 다하던 오래된 데스크톱 뚱뚱이 모니터 이미지를 연상했다. 


실제로 출판사에서 에디터로 근무하던 당시, 같은 사무실 공간 디자이너의 오래된 뚱뚱이 모니터가 "펑"보다는 "푸억"하고 토해내는 소리를 내더니 연기를 뿜으며 목숨을 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모니터로 기어 들어갈 기세로 원고를 편집하며 빼곡한 글씨들 틈에서 스페이스 두 칸마저 잡아내던 편집자들과, 뒤섞인 이미지 속 주요 피사체를 누끼 따느라(흔히 "누끼딴다"라고 하는데, 이미지에서 배경 없이 피사체만을 떼어내는 작업을 말함.) 눈 깜빡이는 것도 잊은 디자이너들이 농담 삼아 '머리 터지겠다.'라고 한참 말하던 마감 때였다. 


출판사에서는 가끔 머리 대신 몸(손)을 써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곤 했는데, 마지막 교정이 완료되어 인쇄소에서 책으로 출력되어 나온 책에서 뒤늦게 오탈자나 수정할 부분이 발견된 때다. 그럴 땐 회사에서 급히 인력을 차출하여 인쇄소 현장으로 간다. 이미 찍혀 나온 책자들을 조심히 열어 오탈자 수정 테이프를 붙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출력 전 해당 오탈자를 못 잡아낸 편집자는 죽을 맛이었겠지만, 나는 내심 한 번씩 업무 공간을 바꿔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하는 스티커 작업이 좋기도 했다. 그래서 봐야 할 원고가 태산 같아도 인쇄소로 출퇴근하는 날들은 달콤했다. 




요즘 나는 주로, 아니 거의 완전 '손'으로 일한다. 그 일이 꼭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주부 및 일당 받는 대체교사로 일하면서 학교로 출근하는 시간 외에 주어진 내 시간엔 머리 보단 손이 월등히 바쁘다.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폐쇄되고 거의 자택 감금 수준의 날들을 보내는 때엔 '손에 물이 마를 새' 없다. 하지만 손에 물이 마를 새 없는 정도는 손으로 하는 일이 주는 재미와 보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손으로 하는 일은 주로 스콘, 비스킷, 통호밀빵, 사워도우 브레드, 그레놀라바를 만드는 베이킹이다. 그 외에 아침에 마실 커피 원두를 갈고 물을 부어 내리는 핸드드립 커피를 만드는 일. 따져보면 그냥 주문하고 사 먹는 게 효율적이다. 하지만 손으로 하는 일의 가치는 애초에 시간, 비용적 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스콘 만들기


머리로 하는 일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고, 아닌 척할 수 있고, 머리 한 번 더 쓰면 더 크고 화려하게 꾸며낼 수 있고, 머리를 다르게 써 변형도 시킬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머리를 써서 일을 해도 그 결과는 다르게 나오고, 실제 결과는 같다손 치더라도 다르게 포장되어 다르게 보인다. 또한 머리를 써서 한 일의 결과는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머리로 한 일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느라 또 머리를 써야 하고, 그것 또한 슬프게도 머리만 아프지 정답과는 영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손으로 하는 일도 사람마다 차이라는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 주어진 조건과 들인 노력이 비슷하면 그 결과도 비슷하게 나온다. 즉, 손으로 하는 일의 결과는 정직하다. 내가 손을 놀린만큼 그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는 곧바로 혹은 가까운 시간 내에 바로 나온다. 쓴 손에 휴식을 주고 기다리기만 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결과가 내 눈앞에 나오고 수정을 할지 변경을 할지 손을 더 댈지 말지 즉각 판단이 되니, 이 얼마나 정직하고 명확한가. 


사워도우 브레드 만들기


요가, 요리, 베이킹, 드립 커피, 꽃꽂이 등 요즘 인기 취미생활들은 그러고 보면 다 몸(손)으로 하는 일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머리와 손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손으로 하는 일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서 찾고 있는지도.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너무 피곤한데 잠이 안 드는 날. 머리가 피곤할 뿐 몸은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이킹하느라 반죽을 젓거나 꼬집어 대고, 사워도우 만드느라 사워도우 스타터에 밀가루와 물 반죽을 비벼 넣고, 그래놀라 바에 넣을 땅콩 아몬드를 찧어대다 보면 힘들어서 쉬어야 한다. 머리로 하는 일은 머리를 얼마나 썼는지 각자가 느끼는 '지끈함의 정도' 외에 티도 나지 않는다. 반면 손으로 하는 일은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손목이 벌벌 떨리고 힘이 없어진다. 손에 힘이 없어지면 반죽에도 힘이 안 들어가 그런 상태에서 일을 지속해봤자 빵이 탄력이 없다. 일의 적정 수준을 정확히 알게 하고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는 것. 그것 또한 손으로 하는 일이 주는 좋은 점이다. 불가능이란 없다! 한계는 없다! 끝이 없는 냥 달려 나가는 것이 우리의 능력인 것처럼 칭찬받지만 사실 머리 터질 것 같다. 한계를 넘어서면 우리가 만나는 건 정작 '멘붕' 상태 아니던가. 


그래놀라바 만들기
비스킷 만들기


그렇게 머리만 쓰던 일상에서 몸을 쓰는 재미를 찾을 여유를 챙기지 못했던 나는, 지금 매일매일 그렇게 베이킹을 해 댄다. 아침으로 먹을 빵이 우리 집에 떨어지지 않는 이유, 전 법무팀장이 화물 트럭을 모는 이유, 퇴근하고 요가 갈 시간을 생각하며 당신이 지금 버티고 있는 이유, 주말에 늘어져 자도 좋으련만 당신이 새벽같이 일어나 꽃꽂이할 꽃을 사러 부지런히 꽃시장으로 가는 이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손이 하는 일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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